김지숙개인전 -M is B-

아이가 울고 있어요: 김지숙의

덩치가 산만한 남자 아이가 울고 있어요. 그것도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혼자서 외롭게 울고 있어요. 그런데 왜 울고 있을까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았기 때문일까요. 혹시 모르죠, 버려졌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울고 있는 모습만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요. 간혹 가다 자기조차 왜 우는지 모를 때도 있는데, 어느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요. 행여, 눈을 댕그랗게 뜬 곰돌이가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개를 다리에 묻어버린 아이를 나 몰라라 하는 듯,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두 팔을 치켜 올린 것이, 옛기 이놈, 아이를 야단이라도 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네요. 참말로, 보기 딱할 정도에요.
그런데 이상도 하지요. 옷을 벌거벗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은 다 커 보이는 어른이잖아요. 모름지기 어른이라고 하면, 길을 잃었으면 길을 찾아내고, 문제가 생겼으면 해답을 궁리하는 등등, 사리분별하야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가름해보고, 이런 저런 방도를 마련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렇게 하려면, 몸을 곧추 세우고, 가슴을 활짝 열고, 두 눈을 두루두루 살펴봐도 모자랄 판인데, 어찌된 일인지 고개를 가슴에 박고서 옴짝달싹 않고 있네요. 처음부터 그랬을 리는 만무할 테고, 가슴 속 깊이 응어리가 제법 단단히 박힌 게 틀림없어요. 물론,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게 마련이지만, 저렇게 대놓고 고민한다고 티를 팍팍 내니, 궁금하지 않아도 물어봐야 예의 아니겠어요. 너무 야박해 보인다구요? 할 수 없잖아요, 아무리 나눠 갖는다고 해도, 나의 것은 나의 것, 남의 것은 남의 것, 성숙한 어른이 된 이상, 혼자서 책임을 끙끙 져야할 밖에요. 게다가, 뻔히 보이는 것도 나눠 갖기 힘든 현실인데,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눠 갖기란 얼마나 힘들겠어요. 행복을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공익광고는 살랑대지만, 곧이곧대로 믿다간 어디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겠냐구요. 물론, 노력은 해야겠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럴수럴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사실, 앞서 말은 안했지만, 벌거벗은 것도 혀를 차게 만들어요. 요즘 누드가 유행이라서 벗은 것 같지도 않고, 두 눈을 쏙 빼놓을 만한 몸매는 아니잖아요. 물론, 농담이에요. 하지만 농담밖에 할 게 없는 것을 어떻게 해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벌거벗고서 쪼그려 있는 모습이란 게, 어려운 말로 퇴행이다 기원 찾기다 기타 뭐다 하는데, 딱 잘라서 투정이기 밖에 더 하겠어요. 날 좀 바죠, 안 보면 울어 버릴 거야, 결국 이 말이라고요. 이런 것 받아주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요. 버릇만 나빠지거든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좋아요. 요즘 투정을 받아주지 않아서 울고불고 법석대는 못난이들이 좀 많아요. 자기 말 안 들어 주니까, 되지도 않는 떼를 쓰면서 헛소리를 질러대고, 엉망진창 좌충우돌 막무가내 종합선물세트가 따로 없지요. 북슬북슬한 오리는 깃털 하나만 뽑아도 동네방네 떠나가라 운다잖아요. 딱 그 짝이에요.
이런 이런, 그래도 조심한다고 했는데, 야박한 정도를 넘어서, 구박 떼기 취급이네요. 바른 말도 고운 말도 많은데, 나무라는 말 뿐이니, 복 받기는 애시당초 그른 것 같아요. 게다가 물어본다고 해놓고서, 깜빡 잊어버리기까지! 토라져도 할 말이 없네요. 하지만 말 한 마디 붙여보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에요. 왜냐구요? 자기 세계에 꼭 갇힌 채, 인형처럼 꼼짝도 안 하는 것을 보면, 말을 해도 과연 들을 수나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내 잘못인지 그 잘못인지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요.
옛날에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하면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 때로는 여우가 등장해 사람을 골탕 먹이고, 가끔은 원혼이 출현해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등등, 온갖 괴이한 세계가 펼쳐진다. 일찍이 우의・우화allegory라고 불렸던 형식이다. 등장인물이 선과 악과 같은 ‘이념’을 재현하는 까닭에, 당연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른 후, 이념 대신 ‘살아 있는 인간’이 들어서고, 그것도 모자라 열심히 인간을 살해하고 있는 오늘날 보자면, 낡디 낡은 형식과 내용인 것이다. 하지만 낡았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은 아닌 법, 새 시대에도 흥미로운 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니, 그게 바로 ‘일부러 떼어놓기’ 효과다. 옛날에 옛날에 하면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갈라놓고, 두 세계는 믿거나 말거나 아무 관계없다고 시침 뚝 떼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방식을 달리해, 영상에도 존재한다. 내용적으로 우의적 형상(상투적 기호)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 형식적으로 장치를 동원할 수도 있다(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러 수준에서 둘을 결합하곤 한다). 전자가 비교적 과거에 많이 활용되던 방식이라면, 후자는 최근에 많이 응용되는 방식이다. 김지숙의 는 바로 후자에 속하며, ‘무대화’를 형식적 장치로 사용한 사례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현실과 호흡하는 대신, 텍스트 내부에 무대를 꾸며, 일찌감치 마음 놓고, 멀찌감치 거리 두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치 본 방송은 사실과 아무 관계없으니 운운하는 TV 프로그램처럼, 안심하라고 속삭이는 것과 비슷해진다.
게다가, 사진이기 때문에 이 효과는 더욱 강화된다. 왜냐하면, 사진이라는 매체의 성격상 끌어당기는 힘이, 회화만 못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끌어당기기는커녕, 밀어낸다고 해야 정확하겠다(이 부분에서 사진과 회화의 장단점 운운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리라). 왜냐하면, 한편으로 사진이 어떤 예술형식보다 현실을 정확히 일순간 고정시킨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표면은 마치 거울처럼 바로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리까지 씌워놓으면, 반사효과는 배가되어, 가장 현실적이라는 믿음을 비웃듯, 시선을 교란시킨다(포토리얼리즘은 이 점에 천착한 양식이리라).
이제, 이렇게 설정된 거리가 에서 과연 조직적으로 활용되고 있는지 물을 차례다. 우선 무대에서 사용된 소품을 나열해 보면, 야구방망이, 풍선, 리본, 군용모자, 세발자전거, 곰돌이인형 등등이다. 대체로 소품에 알맞게 몸짓들이 ‘우의적으로’ 연출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상투적 형상이 고의적으로 반복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곰돌이를 등에 업은 형상을 생각해 보자. 어깨를 움츠리고, 가슴을 파묻고, 쪼그려 앉은 모습은, 정확히 남성의 퇴행과 하강의 징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왜 그렇게 무너져 내렸을까. 우의에서 그런 질문을 한다면, 우문이리라.

- 전시기간 : 3월 30일(수)~ 4월 12일(화)
- Open : pm 6:00

Post a Comment
*Required
*Required (Never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