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원 개인전 - 늑대너구리 불량한 사물

불량 오브제의 욕망과 잃어버린 사물의 귀환

아니다! 잃어버린 것은 사물이라기보다는 어떤 기억일 것이다. ‘기억’이라는 집합명사는 나를 가능하게 해주는 마법의 열쇠다. 나는 기억에 의해 비로소 내가된다. 만일 어제를 또는 바로 조금 전 벌어진 사태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지금이라는 사태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기억이 멈춰버린다면 나는 지금이라는 영원 속에 갇혀버린다. 기억은 즐거운 것들을 현재 있음으로 소환하기도 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잊고 싶은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하기도 한다. 기억의 운동은 우릴 사방으로 분리하는 사물에 각인하고 반향한다. 기억은 곧 사물의 기억이 된다. 그럼 사물은 무엇인가? 원자론자들이 믿는 물질인가, 아니면 형이상학자들이 믿는 초월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인가. 어쩌면 결코 일상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없는 사물을 어디다 사용할 것인가. 그것이 기억과는 또 무슨 상관인가. 본질적이며 원형적인 사물의 사유는 그 내포하는 의미를 무한히 변주하며 끊임없이 확산해버리니 그것을 포착하고 표현하기란 애초에 불가능진다. 모호한 의미와 대상은 운명인가? 오히려 사물의 의미를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것들로 제한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의 경험과 표현을 업으로 하는 제작인들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로 사물을 제한한다. 또 기억을 보관하는 창고로서 사물은 우리 주위에 널려있어야 한다. 아니 비록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더라도 분명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은 비로소 오브제가 된다. 오브제로서의 사물은 상상력이 넘치는 제작자들에게는 영감의 원천이며 또 표현의 구체적 재료가 된다. 이 지경에 이르면 모든 형태의 이미지들 또한 오브제로 환원된다. 이미지는 분명한 하나의 사물이 된다. 이 세계에서 오브제 사냥꾼들은 자신의 모든 감각과 예지력을 동원하여 이리저리 사냥터를 배회한다. 어떤 의미에서 김시원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일상을 야생의 사냥터로 삼아 포획한 사냥물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끝없이 옆으로 새고 예측할 수 없는 경로를 따라서 진행하는 과정이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한다. 그 모티브란 아마도 아주 하찮고 사소한 것들도 분명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무한한 세계를 지닌 것들이 아닐까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적 사유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이상한 가이드라인을 따라서 세계는 구획되고 사물은 오브제가 된다.

김시원의 작업은 좀 불량해 보인다. 상처가 배인 것들이 또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생의 끈끈한 액체가 우리의 신발 밑창에 진창을 만든다. 이 걷기 불편한 그래서 심기 또한 불편해지는 것들이 그의 세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오래 전에 사용기한이 지나버린 싸구려 용품들이 탁탁한 공기를 호흡하며 슬슬 망각의 구석에서 기어 나와서는 우리의 비위를 건드린다. “제기랄…제기랄…제기랄!!!”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보통의 세계와 그 보통의 세계의 보통의 원리와 체계를 향해 투덜댄다. 그의 오브제들은 기묘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삐딱한 상상의 이미지를 실현한다. 이 우울한 키취들은 어느 것도 닮지 않은 것들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의 자리를 모색하는 듯 하다. 언뜻 이 자존심 강하고 도도한 오브제들은 무엇인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하기엔 왠지 상투적이라 머쓱하다. 뭐 새로운 해석은 없을까? 새로운 의미는? 아니 새로운 감상과 감각은 없단 말인가? 오브제들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가 비슷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어지럼증이 배속에서 또아리를 틀어대는데 이건 분명 어떤 갈증, 공복의 감각일 것이다. 모더니트스들이 권태로 표현했던 그 배고품이라는 감각. 어떤 대상도 삼켜버리는 공허라는 터무니없이 강렬한 욕망의 거처에서 작가는 잃어버린 것들, 망각의 세계에 사는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으는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11.10 ~ 2005.11.22

- Opening 2005.11.12(토) pm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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