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구 개인전 - Networked Identities

Networked Identities _ 타인에 대한 함수

생각과 움직임, 동작, 말, 이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나를 위해 결정되고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곰브로비치)

정신의 세계에는 분명 항구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폭력이라고 해서 말뜻 그대로 물리적 힘으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외부에서 비롯된 무엇인가 내부로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당연히 사건이 발생한다. 외부의 존재는 역사를 달리하며 다른 가면을 썼다. 신의 얼굴도 썼었고, 이성의 얼굴도 썼었다. 이에 따라, ‘사건’ 역시 시기마다 다르게 현상했다. 현대 과학기술문명의 잔인한 손길을 몸소 경험했던 아도르노. 그에게 외부의 존재는 기술 뒤에 몸을 숨긴 도구적 이성과 파시즘이었다. 그러니 아도르노에게 사건은 ‘마찰’이었다. 아도르노의 찌푸린 얼굴은 천성이 까다롭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고슴도치마냥 손대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외부의 존재는 이제는 정말로 ‘폭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르시스신화는 철학에서도 여러 판본으로 재생되고 여러 의미로 번역됐다. 이 가운데 ‘자기애’는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이나, 오늘날 정신분석학은 새로운 해석의 단초를 부여했다. 그것은 바로 얼굴을 비추는 거울의 존재다. 흔히 얼굴이 사람이라고 한다. 이 말은 얼굴이 육체적 정체성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습게도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며, 거울처럼 다른 매개mediation가 있어야,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현대의 예술에서, 이러한 상황은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무심코 거울을 보다가, 낯설게 비치는 자기 모습에 놀라는 것이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얼굴을 그것도 맨얼굴을 온전히 전체로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온전히 그려진 얼굴을 지그시 쫓다 보면, 자신이 익숙하게 그렸던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라깡의 기여는, 다른 이론이 강박적으로 ‘주체’로 돌아갈 때, 숨겨진 거울을 들추어내어, 거울의 기능을 분석했다는 점이다. 그는 거울에 비치는 ‘나의’ 영상이 아니라, ‘거울’이 비추는 나의 영상을 문제로 설정한다.

그저 타인에 대한 함수일 뿐이다.

이에 따라, 주체는 타자의 담론이 머무는 그릇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은 디지털기술 때문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id’는 가상공간으로 들어가는 신분증이자 ‘신원확인’identification의 절차였지만, 역설적으로 신원확인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수많은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며 생성된 정체성들identities은 스스로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을 망각하고 교란한다. 넘쳐나는 id들 속에서 주체는 스스로 길을 잃는 것이다. 초기에 사이버공간이 ‘사이비 공간’이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던 논란은, 현실원칙의 집요한 끌어당기기였겠지만, 이제는 문제거리는커녕 향수를 불러낼 정도다. 한승구의 작업은 이러한 상황을 곧이 곧대로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개념과 설정은 단순하다. 여러 사람의의 모형을 만든 후 얼굴에 얼굴영상을 투영한다. 이때 영상은 관객의 손길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매체가 다른 매체를 시험하고 변형할 때 수행하는 방식을 통해 매체를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의 매개된 자아를 앞서 매개된 자아의 변형된 판본으로 이해한다.”(볼터・그루신) 한때 매체는 주체가 무엇을 담는 그릇이었고, 그 후 매체는 (무의식적으로) 주체가 담기는 그릇이었다면, 이제 주체는 (의식적으로) 몸소 자신과 서로를 매체에 담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는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흔히 가면의 기능은 가면 뒤에 있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면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아니면 가면 뒤에 또 다른 가면이 숨겨져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스스로 가면을 쓰는 순간에,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 즉 가상공간 주체의 의식은 현실 공간 주체의 무의식이다. 가면이 은폐하는 것은 가면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면은, 가면을 가린다. 한승구의 작업은 그것을 발가벗기고 있는 셈이다. (4개의 소제목은 모두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에서 따옴)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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