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머신 ; 무엇보다 기계적인

1 기계와 함께

몰려든 군중들 사이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엔진과 모터가 회전하며 다양한 모양의 톱니바퀴와 연결밸트를 회전시켰다. 계속되는 작동가운데 거대한 기계장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진동하였다.

1960년 프랑스인 장 팅켈리는 스스로 파괴되는 유쾌한 자살기계장치 <뉴욕에 대한 경의>를 제작하여 세계 2차 대전을 전후로 세계의 산업과 문화를 주도하게 된 미국에 대해 익살스런 비평이자 경이를 던진다. 이 작품은 미국식 기계문명이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에 대한 작가의 복잡한 심경과 논평으로써 본래는 스스로 파괴되도록 고안되었지만 부실한 제작으로 뉴욕소방소의 도움으로 파괴되는 퍼포먼스로 끝났다. 미국의 상징인 뉴욕을 기념하는 이 기괴한 기계장치는 예술이기에 앞서 자기 스스로 요란한 굉음을 내는 한바탕 난장과 소동이었다. 이전에는 가능치 않던 충격적이며 요란스런 사건의 경험이 이 기계장치를 20세기에 나타난 현대미술의 한 축을 예시하였다.

<하드코어머신>展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은유이자 기계적 존재라는 실재로서의 설치조각의 모음이다. 기계적 장치, 로봇을 시각화하는 작업들이 <하드코어 머신>을 구성한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느끼는 하드보일드식 기계의 정서가 참여작가들을 느슨하지만 기본적인 공집합으로서 작동한다. 이들의 작업은 <매트릭스>류의 첨단 사이버 사회에서도 극구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현대문명의 고전적 기계장치들에 대한 경의이자 논평이다. 그것은 말그대로 기계의 모태母胎로서의 예술욕구이자 몰입감을 지시한다. 이상한 기운이 등골을 진저리치게 한다.

<기계>는 인간의 도구와 기술만큼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의식을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자연을 타자와 하는 순간 인간은 문명과 역사의 단계에 들어섰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의 시작은 기계의 탄생을 통해 가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계의 관념에 서 벗어나 보이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계, 불이라는 기계, 집이라는 기계, 수렵과 농사라는 기계들. 도로, 항로, 수로… 모든 길,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기계이다. 인간의 언어와 그림을 포한함 모든 형태의 의사소통체계와 상징체계도 기계이다.

물론 산업혁명기의 기술과 기계의 발명과 발달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 이전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 성과를 이루어 현대적 의미의 기계적이란 산업혁명기의 기계적 이미지일 것이다.

“기계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그 차이는 대개 운동에 관계된 것으로, 기계에서의 실제 작동 그리고 증명이나 이론에서의 논리적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기계미의 좀 더 추상적인 형태(예컨대 수학, 위상기하학…)를 이해하려면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기도 하다.-데이비드 갤런터 <기계의 아름다움> 중-”

과학자나 엔지니어는 물론 각종 기계장치와 기계운동의 메카니즘에 매료된 예술가들은 기계의 아름다움과 일종의 성욕과도 같은 검은 기름의 유체가 번들거리고 흐르는 기계의 욕정과 오르가즘의 사도가 되기도 한다. 더나아가면 인간이란 욕망하는 기계이고 어쩌면 기계가 꿈꾸는 가운데 인간의 존재가 생성된다고도 볼 수 있다. 현대의 인간과 사회가 지속적으로 기계를 닮아가고 있다면 역으로 기계는 또 얼마나 인간적인가. 위 아래로 격렬한 운동을 거뜬히 해내는 온갖 종류의 기관들, 장치들. 다양한 아니 무한한 운동역학을 보여주는 기계 메카니즘. 정교한 전자장치에서 거대한 발전소 혹은 하역장의 골리앗 크레인들. 자동차들이 질주 하는 도로라는 기계, 인간이 거주하는 집이라는 기계, 침대라는 기계. 혹은 예술가들이라는 또는 형이상학자들이라는 이상야릇한 꿈꾸는 기계들.

아마도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기계의 질감과 기계의 시각, 첨단정보사회에서도 필요한 하드한 장치들과 요소들로 구성되는데 사실 하드코어가 마치 하나의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처럼 쓰여 그 쓰임에 혼동이 있다. 하드코어란 음악적 장르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노골적 표현을 주로 나타낸다. 하드코어는 공학의 맥락보다는 미학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개념-정서운동으로서 전자적 혹은 기계적 장치의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를 연상시킨다. 물론 포르노문화의 특정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의료기구와 신체보조기구들의 날카로운 금속과 정교한 운동을 연상하기도 한다. 하드코어는 현대 문화의 다양한 맥락에서 감정과 심미적 효과들이 설치와 키네틱, 기계장치들로 연결되어 확장 재생된다. 머신에 강조점을 둔다면 하드코어는 기계중의 기계 또는 기계다움의 극단이거나 이상적 기계(이상적이기에 미래적이거나 아주 오래된 과거의) 등, 우리 의식과 사회와 생활에서의 순수한 그리고 그러기에 가장 역동적인 운동을 보여주는 기계의 요소들을 형용할 것이다.

이기일, 이장원, 노진아, 안수진, 장승효, 신기운, 최우람은 전시를 하나의 기계로 꾸미고 그들이 꿈꾸고 상상하는 계기들 또한 심미적 기계로서 해석한다. 기계들 통해 현실의 모든 관계와 운동과 속도가 뒤바뀌고 변동한다. 그들에게 예술과 사회와 정치 모두가 기계라는 실재이자 이미지이자 심미적 힘에 관계한다. 기계의 운동 혹은 인간의 운동은 모든 형태의 과거와 현재를 분쇄하거나 뒤틀리게 하거나 재조정한다. 모든 것이 기계의 이미지로 환원된다.

2 꿈 공장의 기계들

영화 <모던타임즈>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회전과 연속하는 자동생산시스템의 사회,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식사자동기계를 선보인다. 주인공은 유명한 현대사회의 방랑자인 찰리로 그는 이 거대한 기계들과 산업자본주의와 대결한다. 그는 현대인이지만 결코 현대에 속하지는 못한다. 방랑자와 산업 기계문명의 대결은 마치 현대문명과 함께 발레를 추듯 역설의 블랙코미디의 전형이 된다. 여기선 휴머니즘과 기계문명이 화합할 수 없는 대척점에 놓인다.

유명한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인조인간이 자의식과 생존욕구를 갖게 되어 우주의 식민지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만 해야 하는 처지에서 탈출을 꾀한다. 이 부분은 오늘날 노동자들 혹은 일용직 노동자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여하튼 그들은 자신들을 개발한 과학자를 찾아가 살해하는데, 이는 프로이드주의의 부모살해로 비쳐지기도 하고 결국 그를 통해서만 가능한 자아의 음울한 형성과 성장을 비유하기도 하다. 한편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주인공은 인간이면서도 인조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인간문명으로부터 벗어나 도피여행을 떠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인간들 보다 더 인간적인 욕구와 감정을 갖는 인조인간이라는 역설적 구성으로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주인공이 혹 미처 자기 자신이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인조인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유발한다. 더 비약하자면 모든 인간이 고유번호가 인쇄된 인조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낳았다. 영화는 현대인이 점차 비인간화되어가는 반면 기계장치는 더욱 인간을 닮아가는 부조리한 현실을 반영한다.

<타이타닉>에서는 침몰하기 직전까지 타이타닉호를 멋지게 운행시키는 거대한 검은 기름칠로 번들거리며 상하로 거대한 동작을 선보이는 피스톤들은 <모던타임즈>의 톱니바퀴에 필적하는 기계의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틈에서 피어나는 러브스토리. 타이타닉은 운송기계이자 비극의 기계에서 운명적 사랑기계로 탈바꿈한다. <타이타닉>은 <전함 포텐킨>을 연상시키는데, 그것은 역사의 운명과 인민의 운명을 거대한 전함의 웅장한 대포와 기동성으로 몽타주되었던 혁명-예술공학을 보여준다. 타이타닉의 승무원들과 승객들의 최후와 <전함 포텐킨>에 등장하는 수많은 러시아 인민들의 위대한 비극과 위대한 승리가 사랑과 혁명의 이미지로 오버랩 된다.

그저 그런 영화들 중에도 기계와 인간의 다양한 대결과 만남과 어울림이 나타난다. 사실 50, 60년대의 초저예산 B급 영화들이 기계들의 천국을 꿈꾸고 우주선과 우주기계들과의 조우를 그리고 심해의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모험담을 통해 첨단의 기계들을 예시하였다. <바이러스>라는 영화를 보면 우주에서 흘러들어온 괴신호 혹은 생명체가 기계장치와 결합하여 기괴한 괴물로 변한 채 주인공들을 살해한다. 피범벅과 이상한 기계와 전선과 액체가 결합해서는 매우 지저분하면서 질척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비슷한 스토리의 영화로는 <스페이스 트럭커>라는 영화가 있는데 여기서는 우주 식민지에서 화동하는 안티지구연합의 악당이 지구에 살인기계를 배달시키면서 벌어지는 소동이 그려진다. 영화 <애들이 작아졌어요>와 <애들이 커졌어요>에서 보여준 엉뚱한 발명가와 그 가족과 이웃들의 한바탕 소동은 어설프나 기상천외한 효과를 발휘하는 기계들아 얽혀있다.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이상한 상상의 <바이센탈맨>에서는 주인공 로봇이 자신의 주인이었던 인간의 후예와 결혼하는 흐뭇한(?) 해피엔딩의 휴머니즘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랑은 기계와 유기체의 물질구조를 초극한다. <메트릭스> 씨리즈에 나오는 전투장면의 그 무지막지한 기계들의 무용武勇과 스펙타클. <터미네이터> 씨리즈도 좋은 예를 제공한다. 1부에서 터미네이터는 사실 인간을 살해하고 인류를 끝장내는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는 기계문화의 디스토피아적 비전이나 불안을 반영한다. 그러다 2부에서는 정반대로 다른 기계로봇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로 탈바꿈 한다. 여기선 인류의 수호자이며 기계문명의 유토피아적 비전과 희망으로 채색된다. 터미네이터는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여 인간을 살리는데, 이때쯤이면 터미네이터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변모한다. <스타워즈>는 기계미학의 절정으로 보이는데, 스타워즈는 인간의 정신력과 기계문명 혹은 기계의 폭력에 대한 극명한 대조가 나타난다. 물론 기계문명은 인간정신의 충실한 조력자로서 자리매김한다. 는 그 상투적 휴머니즘과 가족주의로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다양한 미래의 기계로봇문화를 선보이고 있다, 첨단 기계공학의 현재와 상상의 미래의 모습을.

애니메이션 <간담>씨리즈의 로봇 혹은 기계병기는 실제 일본에서 6m높이의 강철로 제작되기도 한다. <아톰>, <마징가>, <철인 28호>, <짱가> 등등 일본 애니메이션들과 <로봇 태권V> 등 다양한 로봇들이 기계문명의 일종의 매력을 재생산해왔다. 각종 원자력기계와 마이크로-나노 기계들이 등장한다. 최근에는 <천공의 섬 라퓨타>에서 그리고 <공각기동대>와 <메모리즈>에서 다양한 형식의 기계장치와 로봇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어째든 거대로봇물로 직조된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꿈꾼다. 현대미술가들 특히 영상설치미술가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만화세대이며 실제 만화로 영감 받은바 크고 그들 뉴 제너레이션들은 영화적 만화적 삶을 지향한다. 이에 덧붙여지는 각종 온라인 컴퓨터 게임들이 선보이는 무한강도의 기계들과 기계들이 내는 굉음들. 그리고 이미 기계와 합일한 신체들.

3 예술기계들

미술과 과학의 신화적 징검다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각박한 기계발명들인 비행기, 낙하산, 전쟁을 수행하는 무시무시한 잠수함, 전투기계로봇, 탱크 등은 16세기인들은 꿈에도 그리기 어려운 악마적 상상력을 발휘해서(불길한 왼손잡이 발명가로서) 몇 백 년 후의 기계적 현실을 예견하였고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강철 기차들과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로 구현된다. 현대는 기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다양한 예찬과 불길한 예언으로 넘쳐난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기념으로 완성된 에펠탑 또한 기계의 미를 맘껏 뽐내고 에펠탑 주위를 비행하는 비행기들은 군무群舞를 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기계의 세계의 유토피아에 심취해있던 시기의 예술가들은 힘과 속도와 단순성과 효율성에 탄복하였고 자동자, 기차, 비행기, 증기선 등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다. 물론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겪으며 또 원폭과 환경오염이 조장한 문명 파괴의 사도로서의 기계, 인간은 프랑켄슈타인(1818)적 공포와 묵시적 파국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화가 레제는 동료들을 마치 철제 튜브나 기름통, 이음쇠등으로 만들어진 기계인간으로 묘사하였다. 흰색 금속으로 된 75밀리 포신이 햇빛을 받아 마술적인 광채로 번쩍이는 장면이 깊은 인상으로 자리하였고 레제는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모두 이러한 기계적 광채로 번쩍거리는 공업제품으로 그리고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마리네티와 보치오니를 주축으로 한 미래주의자들은 모든 문명과 사회의 병폐와 악습을 기계혁명으로 갈아치우려 했다. 발레 “기관총과 춤(1917)”, “여류비행사의 춤(1917)”을 시연하거나 “전기의 힘으로 탄생하여…신속하게 변하는 상황에서 양육된 우리”와 같은 연극, “별난 흥분감과 무시무시한 역동감, 천한 농담, 손댈 수 없는 잔인한 인상을 주는 괴팍스런 미국적 인간이 열광하는 육체적 광기의 신기록을 수립하는 무대”와 같은 연극 등을 공연하였다. 그밖에 여인과 결합한 기계장치, 빛과 기계의 굉음과 소음 예찬, 자동소총의 번쩍거리는 아우라와 난폭한 기계들의 질주. 미래주의자들과 파시즘의 힘의 추구와 권력의 추구와 속도의 추구는 타자의 윤리가 상실된 기계의 꿈으로 파국을 맞는다. 물론 미래주의와 파시즘은 여전히 다른 가면을 쓰고 21세기를 폭력과 죽음의 카니발을 연출한다.

괴기스런 혼합과 축적의 구조를 보여주는 슈비터즈의 <메르츠>는 폐기물들과 집과 기계들의 혼혈, 기계부품만 부품들이 연쇄작용으로 움직이며 댄서의 발놀림을 차륜과 톱니바퀴로 비약하는 만 레이의 <댄서-위험(불가능성)>, 아내의 심부름을 잊지 않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수행하고 그러기 위해 거창하면서도 우스꽝스런 설계도를 기획하는 줄리어스 골드버그의 데셍 <이 멍청이야, 이 편지 부치고 와> 등등

19세기말 오스카 와일드는 미국의 산업문화를 보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 미국에서만큼 기계가 아름답게 느껴졌던 적이 없다. 평소 나는 힘과 아름다움은 하나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이런 생각은 미국의 기계문명과 마주쳤을 때 현실로 나타났다. 강철봉들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모습(시카고의 정수장을 보고), 커다란 바퀴들이 박자에 맞춰 좌우 대칭으로 움직이는 광경은 내가 여지껏 본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백남준의 교통사고를 당하는 로봇 K-456(1964년). 그에 따르면 이 로봇은 문명의 파국적 미래를 예견한다. 호주의 퍼포머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스탤락의 , , 등 일련의 작업은 더욱 나아가 신체에 기계장치와 전자장치를 삽입 혹은 결합하는 즉 미래의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예시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결핍, 인공심장을 이식받고 사는 사람들, 기계장치에 의지하는 사람들. 우리의 문화는 기계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서가 아니다 :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다. 한 기관기계器官機械는 한 원천기계源泉機械에 연결되어 있다 : 하나는 흐름을 내보내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끊는다. 유방은 젓을 생산하는 기계요, 입은 유방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다.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숨 쉬는 기계 중 어느 것이 될 것인지 망설인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이것저것 긁어모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기계들을 가지고 있다.-질 들뢰즈<앙띠오이디푸스> 중”

부록-로봇小史

로봇을 만들려는 시도는 고대부터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종교의식의 한 도구로 만들어졌다. 중세 때에는 건물의 문을 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자동인형을 만들었다. 이런 자동인형은 장식용이거나, 또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신(神)과 결부시켜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에 이용되었고, 한편으로는 기계기술자들의 장난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쓰여진 중국 고서 ‘열자’에는 ‘언사’라는 장인이 만든 인조인간이 주나라 목왕 앞에서 가무를 펼쳐보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고대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도 랍비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진흙으로 빚은 인간 ‘골렘’이 등장 한다. 일반적으로 골렘은 프랑켄슈타인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또한 헤라클레스와 오디세이가 만난 움직이는 거대 석상들.

프랑스의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콩디악은 심리학연구를 통해 유명한 대리석으로 만든 인간상의 예를 들어 인조인간의 가능성을 예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오감五感의 성질을 하나하나 이 대리석에 넣으면 이 대리석상은 자신이 받은 감각성질들로 인하여 점차 인간의 심적 현상의 풍부한 전체 내용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로봇(Robot)은 체코의 유명한 극작가 카렐 차펙(Karel Capek)이 1920년에 쓴 희곡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로봇의 어원은 Robota로 체코어로 강제적 노동 또는 노예를 뜻한다. 이 희곡은 로봇들이 자신들의 창조주인 인간을 전부 살해하게 되는 비극을 인상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기계문명 사회 속에서 인간 대 기계와의 관계를 예견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로봇이라는 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자동인형(automata)’ ‘살아움직이는 인형(animatesd doll)’ 등의 말로 로봇의 개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는 19세기 막바지에 발명돼 20세기초부터 광범위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한 매체인 영화에 힘입은 바 크다.

1942년 러시아 태생 미국인 과학자겸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미래의 로봇 소설을 통해 20세기 중반 서구산업사회의 현재적 비평과 미래의 예언적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고 보면 로봇은 다만 중요한 모티브로서 등장하지만 모든 스토리에는 결국 당대의 인간사회와 인간내면의 풍경과 심리 등, 현대생활 전반에 대한 문명사적 비평을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아이작 아시모프는 Runaround라는 작품에서 로봇이 지켜야할 3가지 규칙 이른바 ‘로봇의 윤리헌장’을 언급하였다.

제1원칙 : 로봇은 인간을 해쳐서는 안되며 위험에 처해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된다.
제2원칙 : 로봇은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을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 로봇은 상위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이를 살짝 번역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예술기계의 윤리헌장’

제1원칙 : 예술기계는 인간을 해쳐서는 안되며 위험에 처해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된다.
제2원칙 : 예술기계는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을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 예술기계는 상위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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