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 개인전 - sweet hours

가끔 어떤 사진을 보면, 시간을 헤아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사진 안에도 사진 밖에도, 충분히 정보가 있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지그시 빠져드는 순간, 어느 때인지 가늠하지 못해, 갸우뚱한다. 효과적으로 시간이 탈색된다고 할까. 가만, 사진만큼 현실을 깨끗이 긁어내는 형식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살짝 우스워진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간단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 사진은 멈춰세우는 것, 서로 논리가 틀린 것이다. 물론, 그 옛날 회화처럼 초월한 순간을 잡는 식은 아니다. 그렇듯 한점에 시간을 모으는 방식과 반대로, 사진은 곳곳에 시간을 흩어놓는 식이다. 그래,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헤뜨려 놓으니까, 그래서 수수께끼 맞추는 식으로 되니까,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지도. 김인숙의 <달콤한 시절sweet hours>을 볼 때 심정이, 딱 그랬다.
언뜻 보기에, 사진에서 형상들은 다채롭게 약동했다. 반짝이는 햇살, 알록달록한 빛깔, 하늘하늘한 만국기, 똘망똘망한 눈초리, 해맑게 웃는 아이들, 무엇하나 구김살이 없다. 정말이지 밝게 맑게 펼쳐진 풍경이자 형상이다. 더군다나, 다녔던 학교를 찾은지라, 김인숙이 바라보는 눈길도 따뜻하니, 부딪혀 오는 기운도 따사로울 수밖에. 그런데 어쩐지 익숙했다. 아련히 옛날 시절 떠올리듯, 티 한점 없는 추억처럼, 낯설지 않았다. 야릇한 일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겪은 시간도 아니요, 내가 걷던 공간도 아닌데, 살갑게 느껴진다니. 저고리 같이, 몇 가지 소품만 다르긴 하나, 그것도 별달리 어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순히 일본과 한국의 교육체계가 비슷하기 때문일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 동포이기 때문일까. 생각할수록 갸웃했다.

어쩌면 지금이 사진과 기억이라는 진부한 문제를 새삼스레 따져볼 시점일지 모른다. 사진이 기억을 대신한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사진이, 마치 범죄수사에서 자백을 대체했던 마냥, 일상생활에서 기억을, 갈음했다는 것. 물론, 사진이 자기 잠재력을 활짝 펼쳐 보인 이후, 숱하게 지적된 내용이다. 하지만, 이 테제를 넓혀보면, 사뭇 흥미로운 결과를 새겨볼 수 있다. 먼저, 오늘날 온갖 영상은 홍수처럼 쏟아진다고 하는 정도를 한참 넘어섰다. 양은 질을 바꾸었다. 이제야말로, 사진은 가슴을 밀어내고 기억을 담는 그릇이요 ‘형식’이 된 게 아닐까. 그렇게 보면, 인간의 기억이 믿을 게 ‘못’ 되는 게 아니다. 믿을 게 못 ‘되는’ 것이다. 해서, 현대인은 기억을 가슴에 담지 않게 된다. 굳이 애써가며 가슴에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촘촘히 글자로 남겨가며, 차곡히 쌓아둔 기억, 몇 그램짜리 메모리 하나면 너끈하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십년의 무게는, 몇 그램에 불과한 것이다. 언젠가 소설가 박완서는, 원고지 몇백매나 되는 소설이, 디스켓 한 장밖에 안 된다며, 진저리난다고 했다. 그녀가 푸념했던 까닭은, 원고지의 무게 때문이었으리라, 거기 담긴 삶의 두께 때문이었으리라. 사진으로 ‘호흡’하기에, 삶은 너무 무겁고 두껍다.
좀더 흥미로운 것은, 다음 결과다. 사진이 가슴을 갈음하자, 개인만의 내밀했던 기억은, 여럿의 공공연한 ‘메모리’로 바뀐다는 것. 접속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이네 저네 아무나 ‘메모리에 액섹스’할 수 있는 것이다. 원초시대의 ‘집단무의식’이, 네트시대의 ‘집단기억’으로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어쨌든 모두가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여, 기억이 서로서로 닮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혼자서 살포시 끄덕이던 기억은, 저 멀리 잘 있거라인 것이다. “기억을 싸게 팝니다!”(필립 K. 딕) 이 과정에서, 현대는 시간을, 현대인은 경험을, 완벽히 잃어버린다. 구체적으로 살아 숨쉬는 역사가 사라진다. 영상이 현실을 대체하듯, 체험이 경험을 대체하는 탓이다. 같은 것이, 다른 것을, 제거하는 탓이다. 똑같은 것을 집요하게,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찾아내는 것이다.

가끔 주변을 둘러보면, 구태여 사막을 만드는 사람을 보곤 한다. 할 짓도 없는지, 힘이 넘쳐 나는지, 그렇지 않아도 사막 같은 세상을 사막으로 만들다니, 절로 혀를 차게 된다. 그렇다고 한 줄기 빛이나, 시원한 소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제곱할 것이 따로 있지, 사막을 제곱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사실 쓰디쓴 사막과 달콤한 낙원은 다르지 않다. 사막으로 만들어 주변을 어둡게 칠하거나, 낙원으로 만들어 둘레를 하얗게 칠하거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달콤하지 않은 오늘에서 같은 것을 찾는 것이나, 달콤하기 짝이 없는 어제에서 같은 것을 찾는 것이나, 부질없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달콤한 시절>에서 ‘시간’이 없는 것 같은 까닭이, <달콤한 시절>이 ‘익숙해’ 보이는 까닭이, 드러난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란, 결국 근원 찾기일 텐데, 같은 것일 밖에 없는 것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향 같은 것은, 엄마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이제는 다 안다. 과거는 흘러갔다. 잃어버린 것만이 추억되는 것이다. 모르는 척해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달콤한 시절>이 달콤한 까닭, 따스한 이유다.
하지만 알아 두자. 쓴맛은 계속 볼 수 있지만, 단맛은 금방 질린다는 것을. 한번으로 충분하다. “더럽다구요? 천만에요. 세상은 제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전부이지요.”(발자크) 물론, 세상에 기대할 것은 별로 없다. 세상과 화해할 기대는 그 옛날 끝장났다. 그렇다고 애써 세상을 공격할 필요도 없다. 그래봐야 상처는 자신만 받을 뿐이다. 세상을 깎을 만한 존재는 없다. 있다면, 없는지 있는지 희미한 신밖에 없겠지. 오히려 자신이 깎일 뿐. 바라지 않아도, 시원하게 깎아준다. 이런 게 뼈를 깎는 아픔이라는 것이겠지. ‘셀프’는 물만으로 충분하다. 아픔까지 ‘셀프’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봐주는 것이다. 시퍼렇게 부라릴 필요도 없다. 그저, 또렷이 두 둔 뜨고 지그시 봐주는 것이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버티고 견디는 것이다. 어차피 살만한 세상은, 맘 편히 등 비빌 언덕은, 어디에도 없는 것, 하는 수 없고, 별도리 없는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이 쓴맛 투성이 세상에 기대할 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만, 그녀가 사는 오늘을, 그녀가 걷는 이곳을, 보고 싶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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