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_joo+limheeyoung

pinkroad 

설계자1 :유치합니다.

설계자1 :유치합니다.설계자2 :괜찮습니다. 유치한 이야기를 해보세요.

설계자1 :머릿속에서만 꿈꾸는 판타지는 그야말로 상상에 불과합니다. 항상 현실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판타지가 필요합니다.

설계자2 :네. 그렇습니다. 판타지의 현실화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합니다. 또한 현 실적으로 유지되는 판타지는 실제 시간과 맞물려 있어야 합니다.

설계자1 :그렇습니다. 처음엔 24시간을 연출해서 24시간의 영상을 만들려고 했습 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연출하는 24시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을 했습 니다. 그러나 또 다른 24시간의 가상현실을 만드는 것이 어차피 상상에 의한 인위적인 연출이라면 실제 시간에 의해 제어되는 상상을 구현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설계자2 :네. 맞습니다. 시간의 개념을 빼면 생각의 단면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러나 상상한 것을 실제 돌아가는 현실의 룰 안에 끼워 넣는다면 계속 살아있는 상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계자1 :우리는 재밌는 시계를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시간을 연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유지되는 판타지를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설계자2 :그렇습니다. 실제시간에 의해 제어되는 상상을 구현하려는 것이 우리의 방향 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작품들이 몇 시 몇 분 몇 초 정확하고 똑똑한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수룩하고 바보 같은 모습입니 다.

설계자2 :그렇다고 머저리 같진 않습니다.

설계자1 :그렇습니까?

설계자2 :네.

 

전시일정 2008 10.04-10.25

전시 오프닝 2008.10.04 sat 6pm

* 홈페이지 : www.u-joolimheeyoung.org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전수현의 개인전에 부쳐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전수현의 개인전에 부쳐

이해한다거나 이해를 구하는 일은 관계의 맥락에서만 그 진정성이 있다. 시각예술에서 이 진정성에 대해 눈뜨고 반응하기 시작한 역사는 너무나 짧다. 당연히 이 문제에 물음을 던지는 작가는 고립되어 있거나 외롭다. 아직도 많은 시각예술가들과 그 주변은 형식과 표현에서 예술품이 제작되어지고 평가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매끄럽고 세련된 것은 상대적 평가에서 그런 수식을 전제할 때에만 부분적으로 정당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아직 우리(사회)에게는 시각예술이 퇴행적으로만 변모하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된들 뭘 하겠나?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사람에 대해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시각예술의 범주적 한계 안에서 이미 죽었다. 그래서 이제 예술에 대해, 예술작품에 대해, 예술가에 대해 다시 말해야 한다.

전수현의 작품들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까지 포함해서, 애초에 무엇을 형식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소재들과 대상들은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선택과 결단으로부터 작품 속에 그렇게 ‘있을 뿐’인 것들이었다. 또한 그는 그리거나 색을 채워 넣으면서도 자신의 감성에 내맡긴 채 대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거나 빌려오더라도 이미 대상 그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 결과적으로 적절한 표현은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두 가지의 연속성을 묶어내는 제작방식으로부터 생겨난다. 하나는 ‘관계’ 안에서 읽혀지고 말(설명으로서만)을 하며 이해를 구하는 결단의 방식이다. 여기서 작가의 결단은 결정이 아니다. 꼭 집어 배제시켜야만 확연하기 드러나는 그 선택들이 결단인 한 작가는 배제를 통해 의미를 간추려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시각예술가들은 이 결단의 방식을 이용하여 의미를 확장하거나 깊은 사고로 ‘현저한 그 물음’을 유도한다. 다른 하나는 ‘무엇을’ 시각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며 ‘어떻게 그것을’ 형상화 하는가 하는 의미의 생산방식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눈에 잡히는 모든 것들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대상으로부터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눈에 잡히는 한 형상이지만 형상임으로 인해 의미 안에서 눈으로 보여 지는 것이다. 미술적 행위에 대한 이 전방위적 질문방식은 전자의 방식에 비해 전수현에게 아직 농익지 않았다.

그의 신작 <군대스리가>는 앞선 공화국시리즈로부터 연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만을 위한 고유한 독해 가능성이 좁혀져 아쉽다. 그러나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이해를 구하는 일이다. 그가 구하고 싶은 이해는 우리에게 아직도 유효함을 가지고 있다. ‘집체’가 ‘됨’은 어떻게 그 과정의 유효 안에서 가능한가? 이 물음은 우리에게 매우 신체적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역사성 안에서 유효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물음을 ‘무엇’과 결부시켜 집체의식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공화국시리즈로부터 성장한 탓이다. 작가는 성장하는 개인일 때 비로소 완성되어간다. 모든 작품은 그 고유함을 통해 이야기를 깊이 있게 또는 넓은 폭을 보여주며 감상자를 이끌어낸다. 모든 작품이 가져야 할 이 고유함은 작가의 세계 이해방식에 근원을 둔다. 전수현의 세계이해방식은, 그러니까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아직 깊이와 너비를 더할 수 있는 그런 지평을 이루어내고 있지 않다는 작가의 독백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지평 파악은 사실 우리 사회가 지향할 좌표를 상실한 채 미사여구에 휩싸인 생활에 침몰한 현상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연호 안에는 영토주의와 애국심 그리고 배타성과 민족주의의 왜곡을 그대로 안고 있는 생활인의 참담한 만족이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만족할만한 삶으로 포장되어진, 실종된 자기 정체성위에서 정체성을 대상화하는 거짓을 품고 산다. 작가의 눈에는 이 삶의 방식에 스며들어버린 자신을 포함해 우리-모두에게 어떻게 여기까지 우리가 와 있는지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규정의 의도 안에서만 당대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전수현으로부터 발신되고 있는 예술의 가능성은 이해를 구함으로써 동의하고 동의할 수 있는 관계에서 비로소 규명의 단초들을 찾을 수 있다. 예술은 보편적인 무엇이 아니다. 차라리 보편을 되묻는 물음의 유효가 보편적인 바 그 물음을 지속시키는 것, 힘이다. 물음으로부터 모든 예술작품과 행위는 그 고유함을 잉태하고 있다.

영상은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 점이 사진과 다른 매체 특성이다. 우리는 서사를 통해, 그 서사 안에 촘촘히 박혀져 있는 사물간의 관계를 이해함으로 영상을 보고-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 영상으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작가들은 의도되었던 의도하지 않았던 등장시키는 모든 ‘것들’에 그물망 같은 의미체계 안에서 그 것들을 다루고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장치는 결국 시간이다. 영상처럼 마치 진짜 시간인 것처럼 작동하는 어떤 매체도 없다. 매체 안에서 시간은 그래서 의미망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적인 장치일 수밖에 없다. <군대스리가>에서는 이 시간들이 기승전결의 기본형을 유지한다. 사실 출발점의 시간은 없다. 그러나 작품의 끝부분으로 가면서 작가는 시간의 흐름이 유장한 서사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수식하자면 구차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다루는 이 작품 속 시간의 종점에서 우리는 ‘쉬어-감’을 이해하게 된다. 집체의식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서사로 설명하지 않는다. 왜 쉬어-감으로 작가는 말을 이어갈까? 그 점에 대해 하나의 가정을 전제함으로 전제 즉 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집체(集體)는 모든 인간의 개인 즉 주체성을 스스로 확인하는 하나의 의식구조 속의 조건이다. 관계의 가장 원시적인 형식이고 형태로 남는다. 친구 또는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그러나 관계의 시작에는 집체의식이 작동되고 있다. 우리는 간과하지만, 그것에 대한 간주함 없이 어떤 관계도 실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판단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 우리는 그 근원적 의식으로부터 거대한 형태로 진화를 기꺼이 수용하게 되는가에 물음이 던져야 한다. 작가는 쉬어-감으로부터 관계를 다시 질문하기 시작하려 한다. 탈근대적 전환을 전수현은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탈근대적 전환을 전시에 부치는 글에서 다루는 것은 지나치다. 다만 그의 작품을 근대 미학의 전통 안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자고 제안하기 위해 거론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구조 안에서만 예술적 행위로 연관성을 지닌다.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지 못한다. 다만 모든 예술행위는 이제 전수현의 제작방식과 같이 “어떻게 그것을(작품을, 예술행위를, 작가의 결정을) 말해야 하는가?”하는 ‘~로서 구조’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런 결정은 우리가 예술작품이나 예술가에 의존한 채 불러왔던 예술이해의 한계를 극복하는 출발점에 서 있게 만들 것이다. 말하고, 말을 들으려하는 관계에서만 이제 예술은 규명의 가능성을 열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전수현은 이번 전시를 통해 조금 빨리 그 쪽으로 가고 있는 자신을 보여준다.

글 - 이섭(전시기획자)

전시일정 2008 09.06-09.27

전시 오프닝 2008.09.06 sat 6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