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URS-그리고 만나다: 윤석남, 전하영, 이미정

24.JPG

자매애는 힘이 세다[1]

 

영화 <디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관계된 두 여성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하룻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23, 버지니아 울프는 극심한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댈러웨이 부인>을 쓴다. 1951, 로라 브라운은 벗어날 수 없는 결혼생활의 유일한 안식을 <댈러웨이 부인>에서 찾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 대신 스스로 강물에 뛰어듦으로써 죽음 같은 현실에서 벗어났고 로라 브라운은 죽음 대신 두 아이와 남편을 떠남으로써 비정한 을 선택했다. 하나의 소설을 두고 두 등장인물의 삶이 빗겨나가고 흩어진 시간들이 연결된다.

이른바 페미니즘 미술 1세대인 윤석남과 1980년대 생인 전하영, 이미정은 50년 가까운 시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초기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담론과 관습으로부터 여성의 권리, 주체성,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인 권리를 획득하고자 했기 때문에 반남성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이러한 페미니즘은 출발과 동시에 당대의 과제를 해결해가면서 반세기가 지나버렸다. 이번 전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와 정서를 서로 다르게 경험한 세 명의 여성작가의 시간들을 연결하고 여전히 진행중인 페미니즘 미술의 현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윤석남은 마흔이 넘어 불현듯 그림을 시작했다. 화실에서 꽃과 정물을 그리는 대신 어머니를 작업실로 모셔와 그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가장 익숙하고 또 그리고 싶은 존재였다. 어머니를 그리며 그의 희생과 이타심을 이해하는 과정은 시대를 앞서간 역사적 여성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인간의 이기심으로 훼손된 자연(동물)에 대한 관심에 이른다. 컨테이너에 살며 천 마리가 넘는 유기견을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의 삶을 접한 그는 나무를 깎고 다듬어 1,025마리의 유기견을 재현했다. 인간의 변심으로 버려진 생명을 향한 무겁고도 기나긴 화해의 과정이었다. 3년간 수없이 나무를 들었다 옮긴 탓에 허리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제서야 철든 몸이 되었다고 작가는 겸손한 농담을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1년 무렵 전시를 위한 작업을 중단하고 스스로 휴식기를 갖던 시기 일기를 쓰듯 그린 드로잉을 선보였다. 드로잉 속 작가의 모습은 땅에 내려오지도 못한 그렇다고 완전히 올라서 있지도 않은 불안정한 모습이다. ‘누가 나에게 예술가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상으로부터 20cm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 수 없고 현실 속에 파묻히면 좁게 볼 수밖에 없다.’ 그네에서 춤을 추듯 살고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어머니의 딸에서 딸의 어머니로 살아온 70여 년간의 시간이 남긴 선물과도 같은 통찰력으로 일상을 관조하며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전하영은 영화는 접을 수 있고, 휘어질 수 있으며, 통과할 수도 있는, 부드러운 스크린이다.’ 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영화와 설치 미술의 경계를 교차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3채널 영상 작품 <세계의 틈과 폐기된 엔딩> <박제된 공주>와 편집된 영상 그리고 장소 헌팅 영상 등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세 가지 층위의 영상이 즉각적으로 관계를 주고 받는다. 즉 개봉을 위한 영화와는 별개로 감독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디렉터스컷와 영화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보다 개방된 형태의 관람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2005년 수십 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실제 빨간모자 사건을 모티브로 여전히 성범죄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있는 여성의 불안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상과 함께 전시된 설치 작품- 여성의 잘려진 신체 일부-은 본래 영화 결말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오브제로 기능하며 장르간 교차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저 소리 부분을 지워 버릴 것입니다>는 전하영이 연출한 영상과 윤석남의 목소리가 오버랩 된 신작으로 2013년 윤석남의 너와(shake) 시리즈 작품과 동명이다. 영상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벽에 투사한 다음, 영상을 다시 촬영하는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한다. 또렷하던 이미지가 의도적으로 뭉개지고 선명하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작가는 기술적으로 필터링하는 간단한 방법을 거부하고 영상이 천천히 변해가는 긴 시간을 고집스럽게 지켜보았다. 마치 윤석남이 1,025마리의 유기견을 나무로 깎고 어루만진 3년간의 시간처럼 말이다

이미정은 <자가 수상을 위한 단상>에 올라가 그 누구에 의한 상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상을 내렸다. 그는 20, 여성, 작가로 살아가며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재치 있게 풀어낸다. 스스로를 칭찬하고 위로한다는 개념은 이미정이 지속적으로 다루었던 여성의 마스터베이션 행위와 닿아있다. 섹스 토이를 연상케 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학교에서는 모범생, 집에서는 착한 딸로 성장한 작가의 억압된 무언가의 표출이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그 무언가가 섹슈얼리티나 욕망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가 여성의 마스터베이션을 화제로 올린 것은 그것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거나 혹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와 집단에서 기대하는 역할과 기준을 전복하고 대상과 대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이미정의 작업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읽힌다. 연작은 머리, , 다리, 성기 등으로 신체가 분절되어있는 독립적이면서도 하나로 연결되는 작업이다. 손잡이를 돌리면 360로 회전하는 다리나 허들 모양의 ㄷ자 형태로 꺾인 가느다란 팔처럼 분절된 신체는 각각의 역할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작품의 완성도에 비하면 그 기능은 허무할 정도인데, 아마도 쓸모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그간 억압된 성과 욕망을 다루는 여성 작가는 많았지만 대개 지나치게 표현주의적이거나 그로데스크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오히려 또 다른 모습의 폭력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미정은 게임이나 놀이를 하듯 성을 가볍고 유희적으로 다룬다. 섹시한 유희에 감춰진 날카로움은 소녀 감성 충만한 분홍색 섹스 토이의 반전이다. 

전시를 앞두고 세 작가가 처음 만난 날, 당시 막 개봉한 영화 <춘희막이>를 두고 윤작가는 작게 읊조렸다. “그게 여자니까 가능한 얘기야”. 아들을 낳기 위해 들인 작은집 할머니와 큰집 할머니가 백발이 다 되어 서로 자매처럼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내용. 결코 쉽지 않은 이해와 용서가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일까. 자매애(sisterhood)의 힘을 강조한 미국의 여성운동가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가부장제의 속박으로부터 오히려 남성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막론하고 모든 성차별로부터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운동이다. 페미니즘을 향한 편견과 오해가 종식되고 더 다양하고 행복한 페미니즘 미술이 생겨나기를 기대해본다.
-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김현



[1] 벨 훅스(2000), 행복한 페미니즘(Feminism is for everyone), 박정애 역, 백년글사랑, p.51

끝없이 펼쳐지는 선: 빠키 개인전

우주적 상상력의 즐거운 리듬

비선형적 리듬과 운동을 연출하는 빠키의 설치, 키네틱 작업은 결국 몽환적인 의식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각과 촉각의 운동을 조작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을 비범한 경험의 세계로 진입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일상을 벗어난 의식 상태에서 우리는 새로운 경험과 사유를 위한 영토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오픈된 의식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현대예술가들의 직무 아닌가.

그러므로 가장 순수한 조형-형식의 문제도 조형-형식의 문제를 넘어 ‘상상력’의 지층들에 걸쳐있다. 조형과 언어 또는 조형과 개념의 질서정연한 관계가 급속하게 해체되고 새로운 관계와 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이 예술가 개개인의 세계 안에서 활발하게 생성소멸 과정으로 나타난다. 빠키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하나의 은유이고 그 사물과 연결된 언어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바로 그 자의성을 둘러싼 문제들이 예술분야의 소통이나 관계의 문제와 연결된다. 자의적이란 의미는 의미를 보편적으로 확산하고 소통하는데 불친절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각적 또는 조형적 대상의 조직화라는 예술가들의 임무이자 유희는 관계의 지평에서는 소통의 부재와 혼선의 원인이기도 하다. 불편한 예술이 결국 우리의 상상력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도록 자극한다.

빠키의 오브제들은 매우 경쾌하고 리드미컬하다. 마치 음악을 시각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빠키가 말하는 선(線)의 사유는 보편적인 소통이나 관계를 다루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현대예술은 자유의 극한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작가와 예술이 망각되는 지점까지 도약하는 힘이 작동하느냐 하는 점이 작업의 성공과 실패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무엇이 감각적이며 내적인 역동성을, 동시에 보편적이며 특수한 것들을 연상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빠키는 옵아트 형식의 조형효과를 전체적으로 적용하면서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의 조형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랜티큘러를 사용한 이미지들의 중첩과 운동효과는 빠키 작업의 조형적 특징이기도 하다. 작품들은 약간의 엇박자와 리듬감이 여러 겹의 층으로 구성되어 공간에 배치된다. 작가는 하나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장치물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살아있는 화초 뒤에 연출된 키네틱 설치작품과 전시장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작동하는 키네틱 설치는 인상적이다. 하나는 매우 정적으로 회전하고 하나는 역동적으로 전시장을 위아래로 휘젓듯이 운동한다. 또한 색을 입힌 LED 조명들은 시각적 즐거움과 함께 관객들이 그 사이를 들어가 보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보다 정적이거나 보다 동적인 설치작품들의 시각적 배치를 통해 마치 의식의 어떤 초월적 의사체험을 경험하게 되고 오브제들 사이로 이동하며 만화경처럼 유사하지만 결코 똑같지 않은 시각적 풍경을 경험하게 된다. 작은 공간에서의 상징적 관계 경험을 통해 거대한 우주적 차원을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고대의 진법(陣法)처럼.

조형물들의 의미화 또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색채와 단순화한 오브제들, 그리고 그런 오브제들이 운동하는 설치 등 빠키의 작업은 일상 현실의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나 경험을 지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과 현실의 경험을 재현하지 않는 소위 추상작업에 불편함을 느낀다. 게다가 이번 빠키의 공간연출은 다양한 크기의 오브제와 색채가 관객이 무심결에 지향하는 시각적 질서를 의도적으로 교란하고 있다. 배 멀미 같은 신체의 불편한 반응과 의식의 혼란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현세적 질서와 규범을 벗어난 소리들, 인간을 벗어난 리듬을 시각화하는 문제는 곧 빛과 칼라이고 그 크기와 방향, 그리고 형이상학적 또는 우주적 관계와 관련된다. 그러면서도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작업을 통해 빠키는 아주 오래된 태고(太古)의 상상력을 상기시킨다. 태고의 상상력이란 곧 혼돈과 질서의 투쟁을 의미한다. 그 처절한 존재의 운동이 하나의 시각적 은유가 되어 게다가 시각적 오브제들이 즐거운 리듬으로 변한다. 이 리듬은 여러 방향으로 왕복하고 회전하며 생성소멸의 운동을 재현하다.

현대예술은 아주 작은 사물과 이미지, 조형요소들과 그 흔적을 통해서 무한한 운동과 거대한 우주를 연결시킨다. 관객은 물론 작가의 의식은 그 사이에서 분열하고 다시 조합된다. 그것은 자주 카오스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전시 제목 <끝없이 펼쳐지는 선>은 카오스를 전제로 또는 품은 채 ‘무한성’, ‘확장’ 또는 영원성과 관련된 우주적 차원의 상상력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빅뱅 이후 우주적 차원의 운동의 은유이다.

- 아트스페이스 휴 운영위원장 김노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