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개인전 - 서.른.에.꿈.을.꾸.다 _ 프롤로그

낯선 천사의 방문

김수지의 인형은 어둡다. 어눌하다. 침묵하고 있다.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시선은 결코 강렬하지도 또 어떤 의식의 흐름도 보이지 않는다. 표정과 마찬가지로 그 인형이 만일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의식 또한 잠시 정지한 채 방향을 상실한 상태일 것이다. 정지. 무언가 큰 사건을 겪은 후 망연자실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점점 거대해지는 자아의 한없이 어둡고 긴 그림자를 보는 듯 하다. 추측해보면 김수지의 인형은 인형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거대하고 기념비적이다. 그러나 타인을 향하기보다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향한 내면에 충실한 기념물인 것이다.

첫 개인전 이후 끊이지 않고 표현되어온 것, 작가 자신의 초상을 한 인형들이다. 계속해서 반복하는 복제, 자기 자신을 복제하기이다. 한 때 즐겁고 한 때 감상적이며 한 때 슬픈 표정들이 인형에 새겨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 거대한 인형만이 작가의 무표정한 초상을 한 채 공간에 놓여져 있다. 공간이 정말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은 무언가 거기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지의 인형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텅 빈 허공에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면에서는 결코 인형의 표정처럼 무의미를 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은 작업을 종종 볼 수 있다. 사실 미술가라면 한번이라도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보지 않은 이는 드물다. 또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찬찬히 음미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얼굴과 표정의 변화에 보다 민감하다. 세상의 변화,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자신의 얼굴에서 읽는다. 자기 자신의 얼굴은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얼굴은 결코 세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구속의 징후로 읽을 수도 있다.

김수지의 작업은 일종의 자기애의 독특한 반영으로 읽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운 관계를 갖는 것은 인류의 이상이다. 또 많은 예술가들과 종교인들의 궁극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것은 궁극의 자유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 외에도 세상에는 많은 것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그러나 김수지에게 그러한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작업만으로는 그렇다. 외골수로 보일 정도로 하나의 주제에 몰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주제가 분명 개인적이지만 어떤 보편적인 체험과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김수지에게 자신의 얼굴을 한 인형은 유일한 세계와의 또는 타자와의 소통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린다. 말이 없다. 등 에는 하얀 날개를 달고. 날개는 너무도 작고 창백하다. 아서 단토의 말처럼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분명 자의식의 문제에 깊이 몰두한다. 김수지 또한 그러하다. 그녀의 작업에 느끼는 것은 더욱 거대해진 자의식이다. 그것이 오늘날 너무나 자연스런 내면의 풍경이 아닐까?

한 이야기가 있다. 인간 속에 살다가 자신이 요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떤 심리적 충격을 겪은 후 인간들로부터 완전이 단절된 어는 여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녀는 수도원장이라는 직분에 충실하다 강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다 고난을 겪는 와중에 자신이 인간 세계에 어떤 의도에 의해 던져진 요정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휴머니티를 상실한 채 강도들을 살해하고 홀연히 숲 속으로 사라진다. 이 이상한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김수지의 인형은 말 그대로의 평범한 인형이 아니라 어떤 목적에 의해 우리에게 던져진 존재이다. 우리는 그 인형에 어떤 인성人性을 투사하지만 그것은 소통과 이해불가능이라는 반향만을 돌려줄 뿐이다. 인형은 작가가 어떤 의도로 우리에게 던져 놓은 장치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코 작가 자신은 아닌. 김수지라는 개체와는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역동적이며 불같은 예측 불허의 운동을 보여주는 <이드>처럼 그렇게 김수지의 인형은 김수지 자신조차 콘트롤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무생물이자 날개 달린 신神이기도 하다. 검고 우울한 어떤 아우라를 내뿜으며 한 개인의 내면의 세계가 불가능한 형태로 표현된 듯하다. 누군가 그 세계로 들어가 이해의 생명수를 떠온다면 그것은 어떤 약호 어떤 상징의 비밀은 푸는 자에게 허용될 뿐이다. 하지만 누가 그 물을 떠올 수 있을까? 우리 주위에 만연한 일종의 전염병과도 같은 이념이 바로 소통의 이념이다. 그런데 결코 소통이란 실재하지 않는 어떤 허구가 아닐까? 거대한 세계를 속에 지닌 이 불가능한 마음이라는 존재를. 대우주와 함께 비밀을 나눠 갖은 소우주의 세계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느끼는 것은 느끼는 것이고 느끼지 않는 것은 느끼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러할 뿐이다. 어쩌면 작가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우울하며 무표정한 또 어눌한 한 천사가 우리에게 던져졌다. 그는 내려온 것인가 아니면 창공으로 날아오르려는 것인가? 결코 날렵하지도 세련되지 않은 누추한 모습으로. 김수지에게 헤르메스 신은 그렇게 강림한 듯 하였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10.21 ~ 2005.11.02

- Opening 2005.10.22(토) pm 05:00

윤현정 개인전

<길들여지기_to be tamed> : 어렸을 적 ‘앞으로 나란히’1. 초등학교 입학식 광경을 보노라면, 일대 장관이 벌어진다. 따스한 부모의 품을 벗어나, 아이들이 처음으로 공적인 규율에 맞추려니, 그렇지 않아도 주체하지 못해 안달이 제곱된 몸뚱이가 발작을 해댄다. 낯설어 징징대는 놈은 고사하고, 일이야 어찌 됐든 헤헤거리는 놈은 어떠하며, 사방팔방 안방마냥 헤집고 댕기는 녀석 등등, 당해낼 도리가 없다.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정신이 쏙 빠지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아이들도 나름대로 난관이 닥쳤으니, 앞으로 나란히, 구호에 맞춰 줄서는 게 문제다. 선생님이 참을성 있게, 앞으로 나란히 외쳐도, 듣는 놈 따로 있고 하는 놈 따로 있으니, 일찍이 줄이라곤 서 본적 없던 개구쟁이는 그들대로 어리둥절한 몸짓을 남발하고, 이놈의 녀석들을 제대로 줄을 세워야 하는 선생님은 그들대로 난감한 실랑이를 치르기 일쑤다. ‘주목,’ 이때 선생님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말씀이시다. 한시도 쉬지 않던 눈동자는 이때부터 선생님의 눈짓, 손짓, 몸짓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이때부터 그들은 조금씩 ‘인간’으로 단련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간이 되는 길이란, 멀고도 험하기 마련, 그들은 마르고 닳도록 선생님의 주의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항상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선생님의 말씀을 졸업할 때가 되면, 군대에 가서 상관의 질책을 (유형의 폭력과 함께) 신물 나도록 받아야 하고, 군대를 제대하면, 상사의 주의가 (무형의 압력과 함께) 그를 평생 기다리고 있다. 아, 언제나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험난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영웅은 성배를 찾아서 모험을 떠났건만, 오늘날 인간은 인간이 되고자 하염없이 고개만 돌리고 주의만 하는구나. 그렇게 해서, 주의를 위한 투쟁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이 되고야 만다.

2. 생각할수록 어떻게 버티어 냈는지 신기할 정도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무려 12년 동안 줄기차게 줄을 맞추고 살았던 셈이다. 특히, 어렸을 적 들었던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어찌나 길었고 얼마나 지루하던지, 지금도 아찔하다. 하지만, 정작 놀랄만한 일은, 그토록 오랫동안 지겹고 지루한 일을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길을 걷더라도 어쩐지 똑바로 직선을 유지해야 하고, 어디라도 앉으려고 할라치면 반드시 정한대로 바르게 앉아야 하는 등등, 어렸을 적 ‘앞으로 나란히’는 여전히 우리의 육체 깊숙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 ‘육체의 무의식’이라고 해야 정확하리라. 생각하고 숨쉬지 않는 것처럼, 육체의 몸짓은 사유의 손길이 만지기 앞서서 ‘알아서’ 기어가고 돌아간다. 당연히, 이 육체의 무의식은 여러 종류의 바깥이 노니는 마당이 되기 마련, 권력일 수도, 이념일 수도, 담론일 수도 있다. 무엇으로 명명하든, 사유하지 않는 곳에 육체가 운동한다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고약하다. 윤현정의 <길들여지기>는 이 같은 육체의 무늬를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익숙해서, 생각해보고 반성해볼 거리조차 마련하기 힘든 몸짓을 경험하게 해준다. 구조는 단순하다. 공간에 들어서면, 전방에 화면이 한가득 들어온다. 한명씩 한명씩, 줄맞춰 나란히, 앞으로 나란히, 좁다란 복도를 채워간다. 마치 복도를 위해 존재하는 사물 같다. 게다가, 모두 까만 봉지를 뒤집어 쓴 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는 탓에, 더욱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네 얼굴을 봐, 얼굴을 갈음한 까만 봉지에 쓰여 있는 글을 읽는 순간, 관객은 어느새 화면에 등장한 인형으로 변신하고, 공간은 곧바로 복도처럼 일변한다. 관객과 현실을 끌어당기는 비디오작업 형식이 장기를 발휘하는 대목이다.

3. 잘 알려져 있듯이, 비디오작업은 지루한 경우가 많다. 내용 때문에 지루한 것이 아니다. 비디오형식 일반의 시간성 때문이다. 왜 그런지, 다른 영상언어들과 비교하면 손쉽게 알 수 있다. 비디오는, 영화처럼 시간을 잘라내 서사를 체계 있게 분배하지 않으며, 광고처럼 짧은 시간에 정보와 영상을 압축하지도 않는다. 길지도 짧지도 않는 시간에, 하염없이 반복의 기제가 작동한다. 특히, 현실과 관객을 끌어오는 작업은 더욱더 지루해진다. 왜냐하면, 오늘날 현실이야말로 온몸이 진저리칠 정도로 지루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담론은 강렬해지기 마련이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대’라는 형용사가 자주 사용된다. 놀랄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 기대할 만한 대상을 갈구하기 때문이다.”(다자이 오사무) 현실이 연극보다 극적이라고 하지만, 그랬던 시절은 주체가 현실과 모험을 벌이던 저 옛날 옛적의 일이다. 세상과 화해하기란 애저녁에 글러버린 오늘날의 주체는, 방바닥에서 뒹굴며 매체와 영상을 끌어안고 꿈이나 꾸는 수밖에 없다. 바깥으로 나가봐야, 주체를 소외시킨 세상이 ‘한없이 지루한 일상’의 가면을 쓰고, 되풀이 되는 탓이다. 주체를 무력하게 만든 지루한 일상이란, 결국 학교를 위시한 근대 규율체제의 효과일 텐데, 흥미롭게도 윤현정의 작업에서 지루함과 규율체계의 공모를, 즉 형식과 내용의 공명을 매개시키고 있다.  시계처럼 째깍대며 주의할수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루함이라는 결과인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10.06 ~ 2005.10.18
- Opening 2005.10.06(금) pm 06:00

2006 상상력발전소 작가기획공모 결과

1) 개인 A, B부문 : 김병직, 김혜영, 손동현, 에다, 이샛별, 이애림, 이학승, 이훈, 장석준, 최성록, 한승구

2) 이상 11개의 전시가 선정되었습니다. 공모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상상력 발전소 공모는 2006년에 홈페이지를 통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3) 선정되신 작가분들의 정확한 일정과 공사사항은 개별 공지해 드리겠습니다. ※문의 :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 02-333-0955

장유빈 개인전 - 즐거운 계획

즐거운 계획: 상처를 지우는 방식

1.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생각나는 이미지 몇 개뿐. 잿빛 하늘, 불룩한 돌담, 하얀 손, 빨간 피.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계속 달렸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돌담은 불룩했다. 하얀 손, 빨간 피. 하얗던 손은 금방 빨갛게 물들었다. 불룩한 돌담은 죄가 없다. 그저 그대로 있었고, 하얀 손이 멋대로 훑고 갔으니까. 살짝 살짝 드러나는 빨간 피. 어쩌면 피는 없었는지 모른다. 피보다 진한 슬픔이 그녀의 눈에서 흘렀기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을 봤을 때, 저 사람은 상처뿐이구나,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블루>라는 영화제목처럼, 청초했던 그녀다. 하지만, 빨간 피가 흐른 후, 우울해 보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생각은 여전히 남아서 괴롭힌다.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을까.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해의 문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묵묵히 삭히는 도리밖에. 결국, 타인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 묵묵히 들어주는 정도, 아니면 냉정히 외면하든지. 그것이 현실이다.

2. 장유빈의 <즐거운 계획>은 <블루>만큼 강렬하진 않다. 터질 듯한 분노도, 타오를 듯한 빛깔도 없었던 탓이다. 굳이, 닮은 점을 찾자면, 잿빛 바탕 정도랄까. 외려, 다른 점이 많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왜냐하면, 작업의 질료도 그렇고 방식도 그렇고, 확연히 반대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르기’보다 ‘당기’고, ‘터트리기’보다 ‘갈무리’하고, ‘키우기’보다 ‘줄여’ 놓았다. 예를 들어, 표적으로 선택된 토끼를 봐도 그렇고, 무기로 선택된 뿅망치를 봐도 그렇다. 둘 다 명백히 ‘하강’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강이란 내려가는 것, 대상의 크기나 능력의 정도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녀가 토끼 때문에 분노했을 리는 당연히 만무하다. 살다 보면 부딪히는 사람들과 사건들 때문에 분노했을 터, 망치로 때리고 화살로 던지고 싶은 대상은 분명히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대상을, 그런 강도를, 그녀는 약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장유빈의 질료와 방식은 애교스럽고 장난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해서, 간난아이가 육중한 쇠구슬에 금방이라도 깔릴 것 같더라도, 토끼가 날카로운 창에 찔릴 것 같더라도, 별로 심난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언뜻 보면 잔인한 사건이 멀지 않아 일어날 것만 같지만, 결국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뭐랄까, 풍선을 터질 때까지 불고서 터뜨리려고 했는데, 잠깐 주춤한 탓에 순식간에 바람이 빠져버린 것 같다. 이 같은 면모는 작업에 그대로 반영되어, 무엇인가 터트리기 직전에, 멈추어 서있다. 망치도 화살도 하나도 안 썼다. 그녀는 분노하나, 털어내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블루>하고 겹치는 측면이 불거진다. 그것은 바로 ‘안으로만’ 삭히는 아픔과 분노다. 화살은 ‘내부로만’ 향해 있었던 것이다.

3.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일같이 작은 상처는 물론이요, 시나브로 커다란 상처가 할퀴어 댄다. 그나마 작은 상처라면 어떻게든 참고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작은 아픔조차, 더듬이가 너무 많다고, 자기 신경이 너무 섬세하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넘기곤 한다. 문제는 상처가 컸을 때다. 마치 주변 세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아득해질 정도로 온몸이 마비될 정도의 상처가 생겼을 때다. 어지간한 문제라면 훈련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 문제는 훈련이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상처가 그렇다. 이놈의 것은, 몇 번을, 아니 수십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날이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실수는 되풀이된다.”(양귀자) 이 얼마나 야멸찬 말인가.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일이, 왜 나만 아픈 거지, 울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결국, 혼자서 짊어질 짐이다. 쉽지 않지만, 얼마간 버티면 해볼만 해진다. 누구라도 아플 당시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픔이 잦아야, 시간이 지나야, 겨우 생각할 요량이 생긴다. 아픔과 고통을 어떤 식으로 수용하는지, 그것이 관건이다. “고통이 없다면 인간의 의식이나 사유도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닥친 고통이 관심과 사유를 유발한다.”(김유동) 아름답지 않은 말이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사람과 세상과 부딪히는 한, ‘마찰’은 피할 수 없는 탓이다. 결국, 아픔을 아픔으로 끝내선 안 된다. 아픔을 통해서 ‘바깥’을 담아낸 인식을 낳아야 한다. 아프더라도 묵묵히 견뎌내고 마찰의 대상을 또렷이 쳐다봐야 하는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09.09 ~ 2005.09.29

- Opening 2005.09.09(금) pm 06:00

J.U.F.A

아주 오래된 만남 : J.U.F.A 전에 부쳐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설레이는 일은 드물다. 또, 한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들을 다만 서로 공통된 관심과 열정을 계기로 만나는 일만큼 흥미로우면서도 감상적인 일은 없다. 서로 다른 세계와 현실에서 겪은 경험을 하나의 열정에 녹여내어서로 나누고자 어렵게 만남을 기획하고 실현하는 일은 얼마나 감상적인가. 이번 서울을 방문하는 ‘女子美’ 여자미술대학의 미술인들과의 만남이 그렇다. 나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도 분명 나를 모른다. 우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인시을 갖고 세계를 읽고 이해하고 표현하였다. 이번 전시는 그렇게 서로 교감한 적 없이 서있던 모습 그대로 조우하는 사건이다. 그러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이 만남은 매우 역설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여성 미술사를 거슬러 오르면 나혜석, 박래현, 이숙종, 천경자 등 빛나는 여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청춘을 예술로 불태웠던 곳이 바로 ‘女子美’ 여자미술대학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젊은 미술가들에게 매우 값진 표상이자 선배들로서 그들의 창작활동이 곧 우리의 예술인식의 확장이었다는 사실과 또 많은 젊은이들이 개척한 길을 따라 창작의 세계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로 의미있는 인식이다. ‘女子美’ 여자미술대학은 과거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아시아 여성들의 자아와 정체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어떤 틈을 새롭고 거대한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로 만든 이들도 바로 이 여성미술가들이었다. 어쩌면 철저하게 낯선 사람들 간의 만남으로 여겨질 법한 이 전시는 어쩌면 이런 점에서 대단히 운명적이라 생각한다. 미술을 통한 만남은 매우 오래전 한국과 일본의 선배 미술가들이 약속하였던 것은 아닐까. 이 전시는 한국과 일본이 겪은 현대사의 질곡을 무거운 짐으로 안고 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서로를 타자가 아니라 역사와 삶과 예술 안에서의 세계에서 아시아가 공존할 수 있는 잊어버린 어떤 약속을 기억하고자 한다. 우리는 뒤늦게나마 선배 미술가들의 비젼과 통찰을 하나의 약속으로 되살리기 위해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을 무릅쓰고 이 만남을 성사시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단언하건데 이 전시가 ‘女子美’ 여자미술대학 친구들과의 일주일간의 아주 짧으면서도 완전히 낯선 만남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짧은 인식이 빚은 오해이자 기우로 확인될 것이며, 참여하는 17명의 ‘女子美’ 여자미술대학의 미술가들에게도 매우 값진 경험이 될뿐 아니라 나 자신과 우리 미술계에도 무척 즐거운 사건으로 귀결될 것이다. 끝으로 이 만남을 기획하고 성사시키는데 힘써준 암미자 학형에게 감사를 표한다.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_ J.U.F.A 전시에 붙여서

‘女子美’ 여자미술대학은 예술에 의한 여성의 자립,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여성교육자의 육성을 설립의 취지로 하고 1900년에 개교하여 올해로 105주년이 되었습니다. ‘女子美’ 여자미술대학은 창립 초기부터 아시아읭 유학생을 맞아들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여자미술대학에 최초로 유학온 학생으로는 나혜석(1896~1948)씨가 있으며, 특히 박래현씨, 천경자씨, 이숙종씨는 화가 그리고 활동가로 그들의 활약은 일본에서도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장봉(1939년 졸업)씨는 ‘女子美’ 동창회 한국지부의 대표자이며 그녀의 작품인 자수 병풍은 여자미술대학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현저하게, 각 학과마다 유학생이 늘고 있으며 이번 전시회에 출품하는 안미자씨는 대학원 석사과정 서양화 전공의 2년생으로 모노톤의 그의 화풍은 학국인과 일본인이 느끼는 상이한 표현을 보이고 있어 흥미 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안미자씨와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17명의 현대미술작가가 참여합니다. 그들의 이번 전시가 21세기의 새로운 한국과 일본의 예술활동에 가교역활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여자미술대학대학원 교수 Shigi Goh

- 전시기간 : 2005.08.30 ~ 2005.09.05

- Opening : pm 05:00

2005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 내부공사 -Double B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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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다른 메세지를 동시에 받으면서 살아 있다. 다양한 가치관, 다양한 시점, 다양한 입장으로부터 나온 그것들을 일관성 안에서 파악한다면 우리는 행동 정지에 빠져 버린다. 그리고 우리들도 똑같이 일관하지 않는 메세지를 주위를 향해서 계속 내고 있다.
계속 변화하고 계속 흔들리는 인간존재는, 그 애매함 안에서 망양한 윤곽인 채로 계속 있으면 좋은 것이다. 명해가 아닌 정의를 받고 수용하는 것으로 더블바인드를 출발점이라고 할수가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본의 얼터너티브스페이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의 일부분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진실하기도 하고 진실하지 않기도 하다.

<퍼포먼스>

‘서(書)는 진실로 고정(固定)되었던 음악(音樂)인가?’

퍼포먼서: 토미나가 요시히데 (TOMINAGA Yoshihide)

사운드 퍼포먼스에 대해서…

토미나가의 사운드 퍼포먼스는 서예와 음악을 융합시킨 것으로, 붓 끝에 마이크를 달아 글자를 쓸 때 붓과 종이가 서로 스치는 소리를 기계로 변조시키는 행위다.
쓰는 사람의 숨결이나, 호흡, 리듬, 타이밍이 음악이 되어, 서예의 한순간의 집중력, 긴장감을 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이 퍼포먼스는 동양적 미의식을 토대로 한 주술적이고 파괴적인 창조 행위다.

- 일정 : 2005.08.12 ~ 2005.08.28, 퍼포먼스_  pm 05:00

- 기획 : HIRAMATSU Nobuyuki히라마쯔 노부유키 (+Gallery Director, Artist)

- 참여작가 :
HIRAMATSU Nobuyuki 히라마쯔 노부유키 (Installation)
ISHIGURO Chiharu 이시구로 찌하루 (Photograph)
KATO Manya 카토우 만야 (Movie)
TAKAHASHI Nobuyuki 타카하시 노부유키 (Sculpture)
TOMINANA Yoshihide토미나가 요시히데 (Calligraphy)
YURIKUSA Naoko유리쿠사 나오코 (Painting)

이부록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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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빠름’과 ‘효율’이 지배하는 도시에 여름이 찾아온다. 현대화,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fast ideoiogy, 즉 고속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이자 일상의 헤게모니를 비껴보고, 탐구하고자 한다.
탐구생활 ‘부록’은 빌딩에서, 공장에서, 또는 광장에서 쉴 새 없이 노동하는 인간을 U-turn이 금지된 고속도로에 진입한 자동차에 비유한다. 그들은 흡입, 압축, 폭발, 배기행정을 통해 반복 운동함으로서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직립보행으로 생태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도구의 노예가 되어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나 규정, 그 밖의 모든 이행사항은 과연 인간이 욕망을 지탱할 수 있는 진정한 장치인지 의문해 보게 된다. 또한 도로위의 서로 다른 지향점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는, 이념의 대립위에 서있는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다. 이데올로기의 욕망으로부터 탈주하는 길은 과연 단순한 ‘느림’일까, 아니면 더 빠른 속도일까?
인간의 존재기반은 과연 도로를 벗어나 어떤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까?

도로로 전치된 전시장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 여름에도 계속된다.
탐구생활은 학창시절, 특히 방학 기간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부록.

Slow season project
2005 탐구생활 부록 ½

흡입, 압축, 폭발 그리고 (욕망의) 배치
Inhalation, Compression, Explosion & Arrangement (of desire)

- 전시기간 : 2005. 7. 20(수) - 8. 2(화)

지동훈 개인전 - Traumatic e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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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한 기억장치

상처는 잘 낫지 않는다. 환경오염이 심한 시대에는 여러모로 더욱 그렇다. 몸의 상처가 그러할 진데 하물며 마음의 상처 영혼의 상처는 오죽할까. 몇 년 몇 십년을 상처를 끌어안고 가는 것이 평균적인 인간의 일생이 아닐까. 상처가 오래되면 그것은 특별한 사건이나 사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이 된다. 상처는 정상처럼 행세한다. 아니 그럼 상처가 곧 비정상적인란 말인가? 상처가 비정상으로 여겨질 때 우리는 치유를 생각하면서 혹시 다른 곳도 아픈지 살펴보기도 한다. 상처는 그 상처를 지닌 자 보다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심리적 위세를 떨치는데, 사내들에게 상처나 상처의 흔적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강화시키는 것으로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흔히 참전 용사들이 자신의 상처를 영광의 훈장으로 여겨 자랑하듯. 치명적 상처는 오래간다. 또 상처가 평생의 흉터가 되거나 죽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상처의 원인은 사람 숫자만큼, 자연계의 사물과 사건 숫자만큼 무한하다. 건강한 인생은 타자로부터 혹은 천재지변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째든 상처받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상처가 오래되면 우리는 그 상처의 원인을 망각하곤 하는데, 이러한 망각의 능력 덕분에 우리는 균형 잡힌 생활을 유지하기도 하고 상처를 더 깊이 만들어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우울은 상처의 중력이 오래 쌓일 때 생기는데 원인불명의 비정상적 몸과 정신 상태에서 흔히 발생한다. 자각한다. 우울이 문제라면 흔히 직접적인 상처의 치유가 아니라 상처의 발견 또는 상처와의 조우에 그 해답을 찾는 것 같다. 우울은 오랜 기간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은 증세이다. 우울은 창조를 위한 시간을 예비하고 심지어 창조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생리적 혹은 병리적 실재이자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우울은 영혼의 상처가 어떻게 인간이 현실세계에서 부딪치는 문제들과 사건들을 정서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인간은 영원한 삶과 완전한 존재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우울은 인간 존재의 필연적 조건의 효과로 여겨진다. 상처는 그런 면에서 우울보다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우울은 불투명하고 애매하고 완곡하다. 그런 불투명한 경계로 인해 무한한 이미지들과 상상의 세계가 거주하는 영역을 만들기도 한다. 우울은 끝없이 침잠하는 부동성과 침묵과 인접하면서 예술가들의 현실을 주조한다. 예술가들에게 상상은 다만 상상이 아니고 뚜렷한 실체를 지닌 현실로 다가온다. 그것은 현실이다. 그것은 엄연한 구체적 사건이다. 사물과 세계와 실재로 인도하는 현실적 통로이다.

지동훈의 불투명한 희뿌연 달팽이는 이런 우울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수한 치설을 지닌 이 달팽이는 마치 우울이 우리의 영혼과 시간을 갉아대는 엄청난 힘을 내비치기는 듯 하며 그 끈끈한 액체로 몸을 둘러싸고 천천히 유유히 움직이며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거대한 달팽이는 불안한 어떤 전조를 보여주기도 하는 데, 곧 벌어질 것 같은 심상치 않은 현실의 왜곡과 비틀림을 상징한다. 지동훈의 여러 오브제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주위 사람들을 흔들어 놓고 지나간다. 정상적 미감美感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두뇌와 마음 속에 일종의 기계장치를 심어놓고 망각하는지 모른다. 상처와 우울이라는 이 기묘한 기억장치를.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07.05 ~ 2005.07.17
- Opening : pm 06:00 ~ 08:00

양연화 개인전 - 예술가의 작업실

현대인들은 이미지의 홍수에 위협받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미지를 보고, 만들고, 일상적으로 이를 사용하고, 해독하고, 해석한다. 이미지 생산자인 작가들 역시 생산된 다양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으며 이를 사용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다시 생산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변별성을 모색하지만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다. 우리 생활에서 일상이 되어 버린 다양한 영상 매체가 쏟아내는 동영상 이미지와 사이버 공간의 다양한 이미지에 함몰된 현재의 미술문화 환경에서 작가들이 겪는 환희와 절망은 깊이와 폭에 있어 전대의 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러한 정황은 예술의 정의와 패러다임을 변환시키기도 하고 예술가들에게 심각한 혼돈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양연화는 미술사 전체를 집요하게 천착해 온 그리는일, 재현, 시각 그리고 이미지의 생산과 소통방식 등과 같은 기본적 명제에서 그 해답을 구하고자 노력한다. ‘그린다’ 거나 ‘재현’의 문제는 현대미술사에서 이미 오래 전에 폐기처분된 진부한 전통처럼 보인다. 사진의 발명과 추상미술의 전개과정이 이 폐기 가능성을 가속시킨 바 있지만, 양연화는 이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으며 사진의 문제와도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양연화의 작업이 가지는 독특함은 바로 이 폐기될 수 없는 전통에 대한 일관된 탐구와 폭넓은 재해석에 있다.
그의 제작태도에는 몇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우선 그는 이미지를 하나의 기호로 사용하여 새로운 매체나 화면이 구성방식을 통해 재문맥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에 대한 정의가 그리 간단치는 않지만, 예술영역에서 이미지의 개념은 근본적 표상과 연결되며 생존, 신성, 죽음, 지식, 진리와 같은 영역과 연계된 개념이다. 이미지는 꿈, 이미지를 통한 언어, 정신적 표상과 같은 심리적 활동을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의 이미지는 주제들의 단편으로 하나의 기호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 단편의 의미들은 새로운 모델이나 배경과 만남으로써 종래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의미의 껍질을 유지한 채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코드들의 무한한 역동성으로 코드들의 유희는 다양한 의미를 가능케 하는 두꺼운 언어를 생산하게 한다는 점에서 컨텍스트적 속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미술작품이 컨텍스트성을 가진다는 것은 물체가 조립되어 그러한 켄텍스트적 물체로서 미술작품이라는 결정적 요소를 드러내기를 바라면서 문제시되는 작품과 병치되는 경우를 말한다.

기호화된 이미지의 재현과 합성
롤랑바르트는 그의 저서 《모드의 체계(Systeme de la Mode)》(1967)를 통해 복식체계에 내재된 사회?문화적 의미체계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바 있는데, 양연화가 특별히 의상에 주목하는 까닭도 그 속에 모드가 나름대로 기호화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호는 그것의 대상과 기호화된 대상의 개념 사이에 대체과정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데 이때 대체는 언어의 경우와 사물에서 기호로 작용한다. 즉 기호화한 대상의 개념은 기호로 대체된다. 그가 표현하는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현대성의 시각에 입각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으며, 종래의 주체적 시각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의미를 가진다. 문맥을 전환하는 동시에 주체적 시각의 담론에 비판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나 그 지인들로 구성된 사진의 모델들은 권력적 시각 대신 관람자들과 동일한 차원의 다양한 시각을 제기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보는 행위, 그에 대한 인식, 표현과정과 결과 사이의 미끄러짐과 빗겨 감을 드러낸다. 그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서로 다른 층위들은 기호적 요소로 분절되어 복잡한 수사과정을 거치며 의미의 변주를 생산한다. 이를 통해 서구의 인식으로 가득찬 조형과 예술전반을 구성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찾고자 한다. 회화는 관객의 눈으로 읽힌다. 회화의 공간은 관객의 시선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장이다. 그러나 문자텍스트에 비해서 그 눈의 행로들이 얼마나 더 자유로우며 구성의 제한, 가치와 색의 분배가 어떻든지 간에 회화는 엄격하게 정해진 방식으로 자신들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전통적 회화어법으로 해체된 회화
그는 작품을 상호텍스트성의 문맥으로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와 방식은 관람자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열어 주려는 좀더 비권력적인 시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생산과 소통이 다양한 방법론적 시도룰 통해 열린 소통을 실천코자 하는 것이다. 양연화가 지속해 온 작업과정은 전통적 회화어법을 통한 회화의 전통의 해체라는 변별적 논법이며 향후 우리 미술이 해결해야 할 많은 기본 과제에 대한 의미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서구 현대성의 합리화와 주체화의 원리는 시각의 장에서도 관철되어 왔다. 또한 시각의 장에서 현대성은 현재적 과제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으로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이후 본격적으로 구동되어 온 현대성의 논리가 아직도 시각의 장을 포함하여 우리의 실존적 조건 전반에서 전체적 주형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현대성의 원리가 내포한 부정적 측면과 역사적으로 실현되어 온 현대화 과정의 맹목성 및 여러 부정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현대성의 지평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오늘날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이미지와 매체 폭증의 문화현실은 오히려 개인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예술적 판단을 혼돈 시키는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서 작동하기도 하며, 우리로 하여금 방향감각을 성실하게끔 내모는 어떤 거대한 변동의 일각을 형성하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매체와 상업주의 적 대중문화 논리가 만연하여 진정한 그리기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양연화가 보여 온 시각의 현대성이 가진 문제들로부터 출발한 반성적 태도는 매우 중요하며 의미심장하다. 시류에 편승하여 무조건적인 형식주의 미학의 거부나 무비판적인 포스트모던 양식의 차용, 그리고 자의식 없이 영상매체에 몰입하는 태도가 만연한 동년배의 작업들을 감안할 때, 그의 작업은 그리기와 시각, 이미지의 창조와 소통의 문제를 통해 미술의 기본명제를 대상으로 씨름하는 진지한 인식론적 무게를 가지는 것이다.

속임은 속이는 대상이 속을 때 이루어진다. 반대로, 의도하여 속임의 과정을 숨김없이 드러낼 때, 그래서 누구라도 손쉽게 속임을 알아차릴 때, 속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속임은 속임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속임의 형식을 빌려서, 속임의 내용을 비판하는 것이 핵심이다. <예술가의 작업실>이 바로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 <예술가의 작업실>은 여느 전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여느 미술관에 여느 예술작품을 걸어놓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 같은 형식만 빌었지, 사실 예술・예술가・예술작품에 관련된 통념 자체가 <예술가의 작업실>의 작업이다. 그녀가 전시인쇄물에 가짜경력을 넣은 것도, 하지도 않은 전시를 했다고 적은 것도, 그래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장황하게 늘어선 작가의 약력이란 것이, 반짝이며 길게 늘어선 상품기능 목록과 다른 게 무엇인가, 그렇게 묻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허위경력을 둘러싼 진위확인 작업은, 예상된 과정이자 해프닝이다. 혹시라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녀의 작업에 속을지라도, 즐겁게 웃어보자. -아트스페이스휴 상상력발전소 기획팀-

청소년문화예술교육을 함께 할 미술인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아트스페이스 휴는 6월부터 11월까지 ‘문화로 놀이짱(www.norizzang.org)’과 함께 청소년을 위한 참여미술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청소년과 함께 하는 참여미술 프로그램과 갤러리 투어 프로그램의 진행에 도움을 주실 미술전공 대학(원)생, 졸업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모집인원 : 5명
- 지원방법 : 간단한 프로필을 이메일(artspacehue@hotmail.com)로 보내주세요.
- 모집기간 : 인원마감시까지
- 문의 및 접수 : artspacehue@hotmail.com (모든 문의사항은 메일로만 가능합니다.)

- 활동내용 :
격주 토요일 오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진행되는 참여미술 프로그램의 진행 (AM: 10:00~12:00)
청소년을 위한 갤러리 투어 프로그램의 도슨트 역할 (PM 01:00~02:00)
(전시 작품과 미술 전반에 관한 설명과 안내 역할) 
  
- 프로그램 일정 :
6월25일/7월9일/7월23일/9월10일/9월24일/10월15일/10월29일/11월12일/11월26일
참여미술: 오전 10시~12시 (장소: 아트스페이스 휴) / 갤러리 투어: 오후 1시~2시

- 오리엔테이션 :
6월15일/6월22일 오후7시 장소: 미정
(문화로 놀이짱 사업과 청소년문화예술교육에 관한 설명과 진행방향에 관한 내용 공유)

- 프로그램 내용: 미술창작공방 (참여미술)
대안공간인 아트스페이스 휴와 함께 갤러리 공간에서 젊은 작가들과 함께 작품 제작을 체험한다. 참여작가의   작품에 대해 설명과 함께 관람, 탐방하고 동시에 1일 작가로서의 직접 창작에 참여하고 전시하는 체험 프로   그램으로 창작체험과 함께 홍대인근 밀집해있는 대안공간 및 실험적인 소규모 갤러리를 투어 (미술전공 대학   생들이 도슨트(Docent)로 참여하여 안내 및 설명)함으로써 예술의 다양성과 실험성을 몸소 느끼는 기회를 마   련한다.
야외 프로그램으로 놀이터 공원에서 재활용 창작 공방을 함께 진행하여 순수예술과 생활창작의 모두 체험할   수 있다. 재활용 창작은 버려진 폐박스나 캔, 천조각 등을 활용하여 생활에 유용한 창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미술 또는 예술이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발휘할 수 있는 일상적 놀이문화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 http://artspacehu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