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정권 하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구금되어 있던 옛 성을 평화박물관으로 꾸미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옛날에는 그랬단다하고 옛 이야기처럼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한국에서는 1,000 여 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전국 각지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단지 총을 들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사람은 1만 명이 넘습니다만, 우리는 그 사실을 외면해 왔습니다. 우리가 양심과 평화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기 시작한 것은 채 5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역사는 6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행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독립운동사에 서술되지만, 대한민국에서 행한 똑같은 행동은 반국가적인 범죄로 처벌받아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북대치 때문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정작 한국전쟁 중에 남과 북 어느 쪽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지금처럼 가혹하게 처벌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모은 자료들은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난 받은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옥에 갔고, 아버지는 군사독재의 감옥에 갔는데, 민주화되었다는 우리 사회에서 아들마저 또다시 감옥에 가야하는 가슴 아픈 역사를 모아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하지만, 3대가 감옥에 가는데 아직도 시기상조일까요?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아 위기에 빠졌을 때 총을 들고 나라를 구하는 것 역시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할 나라가 총을 들 수 없는 사람들을 꼭 감옥에 보내고 기어이 처벌하는 그런 나라여야 할까요?

이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많은 분들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수고하신 분들은 이 생생한 자료를 몸으로 만들어 낸 병역거부자들입니다. 그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대표_ 이해동

<양심적 병역거부>

최초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 일제 징병제
일제는 1938년 2월 22일 ‘육군특별지원병령’을 발표하여 조선인이 일본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원병 제도를 통하여 병력자원의 부족을 메우는 한편 조선 청년들을 ‘황군’에 복무케 함으로 황국의식을 주입하려 하였다. 1939년 6월에는 병역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여호와의 증인 38명을 체포하였다.

한 가족에게 지워진 28년, 고난의 세월 - 옥지준 가족사건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사상휘보>에는 등대사(여호와의 증인)사건이 실려 있는데, 경성지역에서 총 31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검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수감된 사람들 중에는 옥지준 일가가 있다. 옥지준 부부는 큰형 부부와 옥사하게 된 동생까지 모두 옥고를 치른 것에 더해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사위와 손자를 감옥에 보내게 된다. 당시의 병역거부 사건은 현재 독립운동의 한 부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포대죄’라고 들어 보셨나요? - 장순옥 사건
임신 3개월의 몸으로 수감되었던 장순옥은 갖은 악형과 열악한 수감 환경으로 인해 유산을 하였다. 여성 수감자들에게는 흔히 수갑형벌이 행해졌다. 그 중 ‘대포대죄’는 양손을 위아래로 넘겨 등 뒤로 묶는 고문이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총을 들지 않았다 - 한국전쟁 시기의 병역거부
심지어 한국전쟁 중에도 병역거부자들은 있었다. 노병일은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위협까지 받았으나 끝까지 군복무를 거부하였다. 한편 국군에 의해 징집된 박종일은 병역을 거부하여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온 나라를 군대처럼 - 병영국가화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인권도 민주주의의 요구도 묵살하였다. ‘국가’라는 이름아래 절대복종을, ‘안보’라는 이름아래 군사화를 강요하던 이 시대에 군대와 전쟁을 부정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973년부터는 병역기피자들을 완전 근절시키기 위해 ‘병무행정 쇄신지침’을 내려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더욱 극심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항명’으로 죄명만 바뀌었을 뿐 - 항명으로 병역거부 시작
강제입영이 시작되면서 여호와의 증인들도 군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집총을 거부하는 것만이 그들의 병역거부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시기 각 지역 병무청은 입영을 독려하기 위해 여호와의 증인 대표들과 연쇄 간담회를 열기도 하였다.

출소하던 날, 어머니 손도 못 잡아보고 다시 교도소로 - 반복처벌
병역거부 수형자 중 최장기수인 정춘국은 1969년에 10월을, 그리고 1974년에 3년을 복역하였다. 형을 마치고 출소 하던 날, 정춘국은 마중 나온 어머니의 손조차 잡아보지 못하고 다시 징집되었으며 4년 형을 선고받아 도합 7년 10개월을 복역하였다.

죽어도 총을 안 잡은 젊은이들 - 병역거부자 사망사건
김종식은 논산훈련소에서 집총을 거부하였고 헌병의 무자비한 구타로 사망하였다. 이춘길은 사단 영창에서 헌병에게 각목구타를 당해 비장파열로 사망하였다. 이춘길의 유족이 군으로부터 받은 위로금이라고는 부대장이 보내온 일만 원의 조의금이 전부였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결성 - 병역거부 사회이슈로 등장
2002년 2월,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36개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을 갖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후 연대회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에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도의 의의를 알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병역거부자들의 등장 - 반전평화주의 병역거부자들
2001년 말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오태양의 병역거부 선언 이후 다른 불교 신자를 비롯해 반전평화주의, 생태주의 등 다양한 신념에 기초한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2005년 5월 현재 16명에 이르고 있다. 이로써 지난 50여 년간 특정 종교인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치부되어 왔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그 간의 사회적 선입견을 벗고 적극적인 인권과 평화적 가치 실현으로서 그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708호 이등병의 편지 - 이등병 강철민, 파병반대 병역거부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였다. 강철민은 “파병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며,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병반대 병역거부를 선언하였다. 강철민의 병역거부는 병역거부행위가 전쟁에 저항하는 직접행동임을 보여준 동시에, 전쟁과 군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사회에 던져주었다.

양심과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위하여 - 세계적인 현황
싱가폴 20명, 아르메니아 12명, 아제르바이잔 1명, 앙골라 19명, 에리트리아 17명, 터키 6명, 투르크메니스탄 4명, 그리고 한국 1077명!

평화의 세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21세기에도 전쟁과 폭력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현재 전 세계 1156명의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차가운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_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자료전

일시_ 2005.0526 _ 2005604
장소_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_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큐레이터_ 이광준 (독립기획자)
아트 디렉터_ 이부록 (작가)
주최_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후원_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오프닝 퍼포먼스_ 4:00

김인숙 개인전 - sweet hours

가끔 어떤 사진을 보면, 시간을 헤아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사진 안에도 사진 밖에도, 충분히 정보가 있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지그시 빠져드는 순간, 어느 때인지 가늠하지 못해, 갸우뚱한다. 효과적으로 시간이 탈색된다고 할까. 가만, 사진만큼 현실을 깨끗이 긁어내는 형식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살짝 우스워진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간단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 사진은 멈춰세우는 것, 서로 논리가 틀린 것이다. 물론, 그 옛날 회화처럼 초월한 순간을 잡는 식은 아니다. 그렇듯 한점에 시간을 모으는 방식과 반대로, 사진은 곳곳에 시간을 흩어놓는 식이다. 그래,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헤뜨려 놓으니까, 그래서 수수께끼 맞추는 식으로 되니까,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지도. 김인숙의 <달콤한 시절sweet hours>을 볼 때 심정이, 딱 그랬다.
언뜻 보기에, 사진에서 형상들은 다채롭게 약동했다. 반짝이는 햇살, 알록달록한 빛깔, 하늘하늘한 만국기, 똘망똘망한 눈초리, 해맑게 웃는 아이들, 무엇하나 구김살이 없다. 정말이지 밝게 맑게 펼쳐진 풍경이자 형상이다. 더군다나, 다녔던 학교를 찾은지라, 김인숙이 바라보는 눈길도 따뜻하니, 부딪혀 오는 기운도 따사로울 수밖에. 그런데 어쩐지 익숙했다. 아련히 옛날 시절 떠올리듯, 티 한점 없는 추억처럼, 낯설지 않았다. 야릇한 일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겪은 시간도 아니요, 내가 걷던 공간도 아닌데, 살갑게 느껴진다니. 저고리 같이, 몇 가지 소품만 다르긴 하나, 그것도 별달리 어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순히 일본과 한국의 교육체계가 비슷하기 때문일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 동포이기 때문일까. 생각할수록 갸웃했다.

어쩌면 지금이 사진과 기억이라는 진부한 문제를 새삼스레 따져볼 시점일지 모른다. 사진이 기억을 대신한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사진이, 마치 범죄수사에서 자백을 대체했던 마냥, 일상생활에서 기억을, 갈음했다는 것. 물론, 사진이 자기 잠재력을 활짝 펼쳐 보인 이후, 숱하게 지적된 내용이다. 하지만, 이 테제를 넓혀보면, 사뭇 흥미로운 결과를 새겨볼 수 있다. 먼저, 오늘날 온갖 영상은 홍수처럼 쏟아진다고 하는 정도를 한참 넘어섰다. 양은 질을 바꾸었다. 이제야말로, 사진은 가슴을 밀어내고 기억을 담는 그릇이요 ‘형식’이 된 게 아닐까. 그렇게 보면, 인간의 기억이 믿을 게 ‘못’ 되는 게 아니다. 믿을 게 못 ‘되는’ 것이다. 해서, 현대인은 기억을 가슴에 담지 않게 된다. 굳이 애써가며 가슴에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촘촘히 글자로 남겨가며, 차곡히 쌓아둔 기억, 몇 그램짜리 메모리 하나면 너끈하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십년의 무게는, 몇 그램에 불과한 것이다. 언젠가 소설가 박완서는, 원고지 몇백매나 되는 소설이, 디스켓 한 장밖에 안 된다며, 진저리난다고 했다. 그녀가 푸념했던 까닭은, 원고지의 무게 때문이었으리라, 거기 담긴 삶의 두께 때문이었으리라. 사진으로 ‘호흡’하기에, 삶은 너무 무겁고 두껍다.
좀더 흥미로운 것은, 다음 결과다. 사진이 가슴을 갈음하자, 개인만의 내밀했던 기억은, 여럿의 공공연한 ‘메모리’로 바뀐다는 것. 접속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이네 저네 아무나 ‘메모리에 액섹스’할 수 있는 것이다. 원초시대의 ‘집단무의식’이, 네트시대의 ‘집단기억’으로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어쨌든 모두가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여, 기억이 서로서로 닮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혼자서 살포시 끄덕이던 기억은, 저 멀리 잘 있거라인 것이다. “기억을 싸게 팝니다!”(필립 K. 딕) 이 과정에서, 현대는 시간을, 현대인은 경험을, 완벽히 잃어버린다. 구체적으로 살아 숨쉬는 역사가 사라진다. 영상이 현실을 대체하듯, 체험이 경험을 대체하는 탓이다. 같은 것이, 다른 것을, 제거하는 탓이다. 똑같은 것을 집요하게,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찾아내는 것이다.

가끔 주변을 둘러보면, 구태여 사막을 만드는 사람을 보곤 한다. 할 짓도 없는지, 힘이 넘쳐 나는지, 그렇지 않아도 사막 같은 세상을 사막으로 만들다니, 절로 혀를 차게 된다. 그렇다고 한 줄기 빛이나, 시원한 소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제곱할 것이 따로 있지, 사막을 제곱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사실 쓰디쓴 사막과 달콤한 낙원은 다르지 않다. 사막으로 만들어 주변을 어둡게 칠하거나, 낙원으로 만들어 둘레를 하얗게 칠하거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달콤하지 않은 오늘에서 같은 것을 찾는 것이나, 달콤하기 짝이 없는 어제에서 같은 것을 찾는 것이나, 부질없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달콤한 시절>에서 ‘시간’이 없는 것 같은 까닭이, <달콤한 시절>이 ‘익숙해’ 보이는 까닭이, 드러난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란, 결국 근원 찾기일 텐데, 같은 것일 밖에 없는 것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향 같은 것은, 엄마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이제는 다 안다. 과거는 흘러갔다. 잃어버린 것만이 추억되는 것이다. 모르는 척해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달콤한 시절>이 달콤한 까닭, 따스한 이유다.
하지만 알아 두자. 쓴맛은 계속 볼 수 있지만, 단맛은 금방 질린다는 것을. 한번으로 충분하다. “더럽다구요? 천만에요. 세상은 제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전부이지요.”(발자크) 물론, 세상에 기대할 것은 별로 없다. 세상과 화해할 기대는 그 옛날 끝장났다. 그렇다고 애써 세상을 공격할 필요도 없다. 그래봐야 상처는 자신만 받을 뿐이다. 세상을 깎을 만한 존재는 없다. 있다면, 없는지 있는지 희미한 신밖에 없겠지. 오히려 자신이 깎일 뿐. 바라지 않아도, 시원하게 깎아준다. 이런 게 뼈를 깎는 아픔이라는 것이겠지. ‘셀프’는 물만으로 충분하다. 아픔까지 ‘셀프’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봐주는 것이다. 시퍼렇게 부라릴 필요도 없다. 그저, 또렷이 두 둔 뜨고 지그시 봐주는 것이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버티고 견디는 것이다. 어차피 살만한 세상은, 맘 편히 등 비빌 언덕은, 어디에도 없는 것, 하는 수 없고, 별도리 없는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이 쓴맛 투성이 세상에 기대할 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만, 그녀가 사는 오늘을, 그녀가 걷는 이곳을, 보고 싶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하드코어 머신 ; 무엇보다 기계적인

1 기계와 함께

몰려든 군중들 사이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엔진과 모터가 회전하며 다양한 모양의 톱니바퀴와 연결밸트를 회전시켰다. 계속되는 작동가운데 거대한 기계장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진동하였다.

1960년 프랑스인 장 팅켈리는 스스로 파괴되는 유쾌한 자살기계장치 <뉴욕에 대한 경의>를 제작하여 세계 2차 대전을 전후로 세계의 산업과 문화를 주도하게 된 미국에 대해 익살스런 비평이자 경이를 던진다. 이 작품은 미국식 기계문명이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에 대한 작가의 복잡한 심경과 논평으로써 본래는 스스로 파괴되도록 고안되었지만 부실한 제작으로 뉴욕소방소의 도움으로 파괴되는 퍼포먼스로 끝났다. 미국의 상징인 뉴욕을 기념하는 이 기괴한 기계장치는 예술이기에 앞서 자기 스스로 요란한 굉음을 내는 한바탕 난장과 소동이었다. 이전에는 가능치 않던 충격적이며 요란스런 사건의 경험이 이 기계장치를 20세기에 나타난 현대미술의 한 축을 예시하였다.

<하드코어머신>展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은유이자 기계적 존재라는 실재로서의 설치조각의 모음이다. 기계적 장치, 로봇을 시각화하는 작업들이 <하드코어 머신>을 구성한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느끼는 하드보일드식 기계의 정서가 참여작가들을 느슨하지만 기본적인 공집합으로서 작동한다. 이들의 작업은 <매트릭스>류의 첨단 사이버 사회에서도 극구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현대문명의 고전적 기계장치들에 대한 경의이자 논평이다. 그것은 말그대로 기계의 모태母胎로서의 예술욕구이자 몰입감을 지시한다. 이상한 기운이 등골을 진저리치게 한다.

<기계>는 인간의 도구와 기술만큼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의식을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자연을 타자와 하는 순간 인간은 문명과 역사의 단계에 들어섰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의 시작은 기계의 탄생을 통해 가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계의 관념에 서 벗어나 보이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계, 불이라는 기계, 집이라는 기계, 수렵과 농사라는 기계들. 도로, 항로, 수로… 모든 길,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기계이다. 인간의 언어와 그림을 포한함 모든 형태의 의사소통체계와 상징체계도 기계이다.

물론 산업혁명기의 기술과 기계의 발명과 발달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 이전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 성과를 이루어 현대적 의미의 기계적이란 산업혁명기의 기계적 이미지일 것이다.

“기계미는 여러 가지 면에서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그 차이는 대개 운동에 관계된 것으로, 기계에서의 실제 작동 그리고 증명이나 이론에서의 논리적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기계미의 좀 더 추상적인 형태(예컨대 수학, 위상기하학…)를 이해하려면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기도 하다.-데이비드 갤런터 <기계의 아름다움> 중-”

과학자나 엔지니어는 물론 각종 기계장치와 기계운동의 메카니즘에 매료된 예술가들은 기계의 아름다움과 일종의 성욕과도 같은 검은 기름의 유체가 번들거리고 흐르는 기계의 욕정과 오르가즘의 사도가 되기도 한다. 더나아가면 인간이란 욕망하는 기계이고 어쩌면 기계가 꿈꾸는 가운데 인간의 존재가 생성된다고도 볼 수 있다. 현대의 인간과 사회가 지속적으로 기계를 닮아가고 있다면 역으로 기계는 또 얼마나 인간적인가. 위 아래로 격렬한 운동을 거뜬히 해내는 온갖 종류의 기관들, 장치들. 다양한 아니 무한한 운동역학을 보여주는 기계 메카니즘. 정교한 전자장치에서 거대한 발전소 혹은 하역장의 골리앗 크레인들. 자동차들이 질주 하는 도로라는 기계, 인간이 거주하는 집이라는 기계, 침대라는 기계. 혹은 예술가들이라는 또는 형이상학자들이라는 이상야릇한 꿈꾸는 기계들.

아마도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기계의 질감과 기계의 시각, 첨단정보사회에서도 필요한 하드한 장치들과 요소들로 구성되는데 사실 하드코어가 마치 하나의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처럼 쓰여 그 쓰임에 혼동이 있다. 하드코어란 음악적 장르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노골적 표현을 주로 나타낸다. 하드코어는 공학의 맥락보다는 미학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개념-정서운동으로서 전자적 혹은 기계적 장치의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를 연상시킨다. 물론 포르노문화의 특정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의료기구와 신체보조기구들의 날카로운 금속과 정교한 운동을 연상하기도 한다. 하드코어는 현대 문화의 다양한 맥락에서 감정과 심미적 효과들이 설치와 키네틱, 기계장치들로 연결되어 확장 재생된다. 머신에 강조점을 둔다면 하드코어는 기계중의 기계 또는 기계다움의 극단이거나 이상적 기계(이상적이기에 미래적이거나 아주 오래된 과거의) 등, 우리 의식과 사회와 생활에서의 순수한 그리고 그러기에 가장 역동적인 운동을 보여주는 기계의 요소들을 형용할 것이다.

이기일, 이장원, 노진아, 안수진, 장승효, 신기운, 최우람은 전시를 하나의 기계로 꾸미고 그들이 꿈꾸고 상상하는 계기들 또한 심미적 기계로서 해석한다. 기계들 통해 현실의 모든 관계와 운동과 속도가 뒤바뀌고 변동한다. 그들에게 예술과 사회와 정치 모두가 기계라는 실재이자 이미지이자 심미적 힘에 관계한다. 기계의 운동 혹은 인간의 운동은 모든 형태의 과거와 현재를 분쇄하거나 뒤틀리게 하거나 재조정한다. 모든 것이 기계의 이미지로 환원된다.

2 꿈 공장의 기계들

영화 <모던타임즈>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회전과 연속하는 자동생산시스템의 사회,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식사자동기계를 선보인다. 주인공은 유명한 현대사회의 방랑자인 찰리로 그는 이 거대한 기계들과 산업자본주의와 대결한다. 그는 현대인이지만 결코 현대에 속하지는 못한다. 방랑자와 산업 기계문명의 대결은 마치 현대문명과 함께 발레를 추듯 역설의 블랙코미디의 전형이 된다. 여기선 휴머니즘과 기계문명이 화합할 수 없는 대척점에 놓인다.

유명한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인조인간이 자의식과 생존욕구를 갖게 되어 우주의 식민지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만 해야 하는 처지에서 탈출을 꾀한다. 이 부분은 오늘날 노동자들 혹은 일용직 노동자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여하튼 그들은 자신들을 개발한 과학자를 찾아가 살해하는데, 이는 프로이드주의의 부모살해로 비쳐지기도 하고 결국 그를 통해서만 가능한 자아의 음울한 형성과 성장을 비유하기도 하다. 한편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주인공은 인간이면서도 인조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인간문명으로부터 벗어나 도피여행을 떠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인간들 보다 더 인간적인 욕구와 감정을 갖는 인조인간이라는 역설적 구성으로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주인공이 혹 미처 자기 자신이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인조인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유발한다. 더 비약하자면 모든 인간이 고유번호가 인쇄된 인조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낳았다. 영화는 현대인이 점차 비인간화되어가는 반면 기계장치는 더욱 인간을 닮아가는 부조리한 현실을 반영한다.

<타이타닉>에서는 침몰하기 직전까지 타이타닉호를 멋지게 운행시키는 거대한 검은 기름칠로 번들거리며 상하로 거대한 동작을 선보이는 피스톤들은 <모던타임즈>의 톱니바퀴에 필적하는 기계의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틈에서 피어나는 러브스토리. 타이타닉은 운송기계이자 비극의 기계에서 운명적 사랑기계로 탈바꿈한다. <타이타닉>은 <전함 포텐킨>을 연상시키는데, 그것은 역사의 운명과 인민의 운명을 거대한 전함의 웅장한 대포와 기동성으로 몽타주되었던 혁명-예술공학을 보여준다. 타이타닉의 승무원들과 승객들의 최후와 <전함 포텐킨>에 등장하는 수많은 러시아 인민들의 위대한 비극과 위대한 승리가 사랑과 혁명의 이미지로 오버랩 된다.

그저 그런 영화들 중에도 기계와 인간의 다양한 대결과 만남과 어울림이 나타난다. 사실 50, 60년대의 초저예산 B급 영화들이 기계들의 천국을 꿈꾸고 우주선과 우주기계들과의 조우를 그리고 심해의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모험담을 통해 첨단의 기계들을 예시하였다. <바이러스>라는 영화를 보면 우주에서 흘러들어온 괴신호 혹은 생명체가 기계장치와 결합하여 기괴한 괴물로 변한 채 주인공들을 살해한다. 피범벅과 이상한 기계와 전선과 액체가 결합해서는 매우 지저분하면서 질척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비슷한 스토리의 영화로는 <스페이스 트럭커>라는 영화가 있는데 여기서는 우주 식민지에서 화동하는 안티지구연합의 악당이 지구에 살인기계를 배달시키면서 벌어지는 소동이 그려진다. 영화 <애들이 작아졌어요>와 <애들이 커졌어요>에서 보여준 엉뚱한 발명가와 그 가족과 이웃들의 한바탕 소동은 어설프나 기상천외한 효과를 발휘하는 기계들아 얽혀있다.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이상한 상상의 <바이센탈맨>에서는 주인공 로봇이 자신의 주인이었던 인간의 후예와 결혼하는 흐뭇한(?) 해피엔딩의 휴머니즘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랑은 기계와 유기체의 물질구조를 초극한다. <메트릭스> 씨리즈에 나오는 전투장면의 그 무지막지한 기계들의 무용武勇과 스펙타클. <터미네이터> 씨리즈도 좋은 예를 제공한다. 1부에서 터미네이터는 사실 인간을 살해하고 인류를 끝장내는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는 기계문화의 디스토피아적 비전이나 불안을 반영한다. 그러다 2부에서는 정반대로 다른 기계로봇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로 탈바꿈 한다. 여기선 인류의 수호자이며 기계문명의 유토피아적 비전과 희망으로 채색된다. 터미네이터는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여 인간을 살리는데, 이때쯤이면 터미네이터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변모한다. <스타워즈>는 기계미학의 절정으로 보이는데, 스타워즈는 인간의 정신력과 기계문명 혹은 기계의 폭력에 대한 극명한 대조가 나타난다. 물론 기계문명은 인간정신의 충실한 조력자로서 자리매김한다. 는 그 상투적 휴머니즘과 가족주의로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다양한 미래의 기계로봇문화를 선보이고 있다, 첨단 기계공학의 현재와 상상의 미래의 모습을.

애니메이션 <간담>씨리즈의 로봇 혹은 기계병기는 실제 일본에서 6m높이의 강철로 제작되기도 한다. <아톰>, <마징가>, <철인 28호>, <짱가> 등등 일본 애니메이션들과 <로봇 태권V> 등 다양한 로봇들이 기계문명의 일종의 매력을 재생산해왔다. 각종 원자력기계와 마이크로-나노 기계들이 등장한다. 최근에는 <천공의 섬 라퓨타>에서 그리고 <공각기동대>와 <메모리즈>에서 다양한 형식의 기계장치와 로봇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어째든 거대로봇물로 직조된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꿈꾼다. 현대미술가들 특히 영상설치미술가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만화세대이며 실제 만화로 영감 받은바 크고 그들 뉴 제너레이션들은 영화적 만화적 삶을 지향한다. 이에 덧붙여지는 각종 온라인 컴퓨터 게임들이 선보이는 무한강도의 기계들과 기계들이 내는 굉음들. 그리고 이미 기계와 합일한 신체들.

3 예술기계들

미술과 과학의 신화적 징검다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각박한 기계발명들인 비행기, 낙하산, 전쟁을 수행하는 무시무시한 잠수함, 전투기계로봇, 탱크 등은 16세기인들은 꿈에도 그리기 어려운 악마적 상상력을 발휘해서(불길한 왼손잡이 발명가로서) 몇 백 년 후의 기계적 현실을 예견하였고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강철 기차들과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로 구현된다. 현대는 기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다양한 예찬과 불길한 예언으로 넘쳐난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기념으로 완성된 에펠탑 또한 기계의 미를 맘껏 뽐내고 에펠탑 주위를 비행하는 비행기들은 군무群舞를 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기계의 세계의 유토피아에 심취해있던 시기의 예술가들은 힘과 속도와 단순성과 효율성에 탄복하였고 자동자, 기차, 비행기, 증기선 등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다. 물론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겪으며 또 원폭과 환경오염이 조장한 문명 파괴의 사도로서의 기계, 인간은 프랑켄슈타인(1818)적 공포와 묵시적 파국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화가 레제는 동료들을 마치 철제 튜브나 기름통, 이음쇠등으로 만들어진 기계인간으로 묘사하였다. 흰색 금속으로 된 75밀리 포신이 햇빛을 받아 마술적인 광채로 번쩍이는 장면이 깊은 인상으로 자리하였고 레제는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모두 이러한 기계적 광채로 번쩍거리는 공업제품으로 그리고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마리네티와 보치오니를 주축으로 한 미래주의자들은 모든 문명과 사회의 병폐와 악습을 기계혁명으로 갈아치우려 했다. 발레 “기관총과 춤(1917)”, “여류비행사의 춤(1917)”을 시연하거나 “전기의 힘으로 탄생하여…신속하게 변하는 상황에서 양육된 우리”와 같은 연극, “별난 흥분감과 무시무시한 역동감, 천한 농담, 손댈 수 없는 잔인한 인상을 주는 괴팍스런 미국적 인간이 열광하는 육체적 광기의 신기록을 수립하는 무대”와 같은 연극 등을 공연하였다. 그밖에 여인과 결합한 기계장치, 빛과 기계의 굉음과 소음 예찬, 자동소총의 번쩍거리는 아우라와 난폭한 기계들의 질주. 미래주의자들과 파시즘의 힘의 추구와 권력의 추구와 속도의 추구는 타자의 윤리가 상실된 기계의 꿈으로 파국을 맞는다. 물론 미래주의와 파시즘은 여전히 다른 가면을 쓰고 21세기를 폭력과 죽음의 카니발을 연출한다.

괴기스런 혼합과 축적의 구조를 보여주는 슈비터즈의 <메르츠>는 폐기물들과 집과 기계들의 혼혈, 기계부품만 부품들이 연쇄작용으로 움직이며 댄서의 발놀림을 차륜과 톱니바퀴로 비약하는 만 레이의 <댄서-위험(불가능성)>, 아내의 심부름을 잊지 않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수행하고 그러기 위해 거창하면서도 우스꽝스런 설계도를 기획하는 줄리어스 골드버그의 데셍 <이 멍청이야, 이 편지 부치고 와> 등등

19세기말 오스카 와일드는 미국의 산업문화를 보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 미국에서만큼 기계가 아름답게 느껴졌던 적이 없다. 평소 나는 힘과 아름다움은 하나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이런 생각은 미국의 기계문명과 마주쳤을 때 현실로 나타났다. 강철봉들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모습(시카고의 정수장을 보고), 커다란 바퀴들이 박자에 맞춰 좌우 대칭으로 움직이는 광경은 내가 여지껏 본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백남준의 교통사고를 당하는 로봇 K-456(1964년). 그에 따르면 이 로봇은 문명의 파국적 미래를 예견한다. 호주의 퍼포머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스탤락의 , , 등 일련의 작업은 더욱 나아가 신체에 기계장치와 전자장치를 삽입 혹은 결합하는 즉 미래의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예시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결핍, 인공심장을 이식받고 사는 사람들, 기계장치에 의지하는 사람들. 우리의 문화는 기계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서가 아니다 :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다. 한 기관기계器官機械는 한 원천기계源泉機械에 연결되어 있다 : 하나는 흐름을 내보내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끊는다. 유방은 젓을 생산하는 기계요, 입은 유방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다.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숨 쉬는 기계 중 어느 것이 될 것인지 망설인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이것저것 긁어모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기계들을 가지고 있다.-질 들뢰즈<앙띠오이디푸스> 중”

부록-로봇小史

로봇을 만들려는 시도는 고대부터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종교의식의 한 도구로 만들어졌다. 중세 때에는 건물의 문을 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자동인형을 만들었다. 이런 자동인형은 장식용이거나, 또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신(神)과 결부시켜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에 이용되었고, 한편으로는 기계기술자들의 장난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쓰여진 중국 고서 ‘열자’에는 ‘언사’라는 장인이 만든 인조인간이 주나라 목왕 앞에서 가무를 펼쳐보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고대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도 랍비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진흙으로 빚은 인간 ‘골렘’이 등장 한다. 일반적으로 골렘은 프랑켄슈타인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또한 헤라클레스와 오디세이가 만난 움직이는 거대 석상들.

프랑스의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콩디악은 심리학연구를 통해 유명한 대리석으로 만든 인간상의 예를 들어 인조인간의 가능성을 예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오감五感의 성질을 하나하나 이 대리석에 넣으면 이 대리석상은 자신이 받은 감각성질들로 인하여 점차 인간의 심적 현상의 풍부한 전체 내용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로봇(Robot)은 체코의 유명한 극작가 카렐 차펙(Karel Capek)이 1920년에 쓴 희곡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로봇의 어원은 Robota로 체코어로 강제적 노동 또는 노예를 뜻한다. 이 희곡은 로봇들이 자신들의 창조주인 인간을 전부 살해하게 되는 비극을 인상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기계문명 사회 속에서 인간 대 기계와의 관계를 예견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로봇이라는 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자동인형(automata)’ ‘살아움직이는 인형(animatesd doll)’ 등의 말로 로봇의 개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는 19세기 막바지에 발명돼 20세기초부터 광범위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한 매체인 영화에 힘입은 바 크다.

1942년 러시아 태생 미국인 과학자겸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미래의 로봇 소설을 통해 20세기 중반 서구산업사회의 현재적 비평과 미래의 예언적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고 보면 로봇은 다만 중요한 모티브로서 등장하지만 모든 스토리에는 결국 당대의 인간사회와 인간내면의 풍경과 심리 등, 현대생활 전반에 대한 문명사적 비평을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아이작 아시모프는 Runaround라는 작품에서 로봇이 지켜야할 3가지 규칙 이른바 ‘로봇의 윤리헌장’을 언급하였다.

제1원칙 : 로봇은 인간을 해쳐서는 안되며 위험에 처해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된다.
제2원칙 : 로봇은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을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 로봇은 상위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이를 살짝 번역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예술기계의 윤리헌장’

제1원칙 : 예술기계는 인간을 해쳐서는 안되며 위험에 처해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된다.
제2원칙 : 예술기계는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을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 예술기계는 상위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피가되고 살이되는….. 이해민선 개인전

핑크빛 통통한 돼지들이 예쁘게 늘어서있다. 에로틱하기까지 한 뽀얀 핑크빛 피부를 가진 돼지들은 너무나 먹음직한데다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훈련이라도 받듯이 잘 정렬된 핑크빛 돼지들은 에로틱한 핑크빛을 다른 동물들에게 강요한다. 다른 동물들은 그들의 색을 잃어버리고, 돼지들이 어떤 메타포처럼 던져준 핑크색 옷들을 입고 벽에 애처롭게 붙어있다. 역시 잘 정렬된 핑크동물들은 그들이 어떤 동물이던 간에 핑크빛 메타포에 의해 돼지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이 핑크동물들은 제 머리마저 거세당하고 멸치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거참 이상한 모습을 하고서 그들은 너무나도 불편하게 벽에 억지로 붙어있다.  멸치는 멸치대로 어이가 없다. 제 몸이 잘린 채 핑크색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들과 억지로 끼워 맞춰진 형태는 종교인들이 그토록 저주를 퍼부어대는 유전공학의 산물인 듯싶다. 원래의 제 몸과 머리가 잘려진 기괴한 합체동물들은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들은 말이 없고 벽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을 사열시킨 미치광이(?) 과학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멸치대가리가 붙여진 핑크색 동물들이 더 귀여운 것도 아니고,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맛이 더 좋은 것도 아닐 테니 어떤 실용적인 목적에 의해 이 실험이 행해진 것은 아닌가보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실험을 한 것일까?

관념적인 이미지의 충돌 실험 - (어긋난 사랑의 소실점에서 만난 그들)

왜 돼지와 멸치인가? 그리고 정체불명의 멸치핑크합성동물은 무엇인가?
핑크색 돼지와 멸치국물 우려내는 영상, 멸치대가리와 결합된 핑크색 동물들의 어울리지 않는 모임은 사랑에 관한 얘기를 하기위해서이다. 거추장스러운 서론은 다 빼버리고 뚱뚱한 돼지와 비쩍 마른 멸치가 가진 상반된 관념에서 추출된 사랑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뚱뚱하고 게으름의 대명사로 유명세를 떨치는 돼지. 돼지로서는 참 억울한 일이다. 좀 더 많은 고기를 먹어보겠다는 사람들에 의해 끼니때마다 주는 사료를 먹는 돼지는 좁은 우리에 갇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는데 어찌 게을러지지 않고, 살이 찌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생존에 대한 걱정 없이 피와 살을 축적해온 돼지는 도살장에 끌려가기 전까지 행복한 꿈만 꾸고 있다.
그렇다면 멸치는 어떠한가? 멸치는 뜻하지 않는 죽음의 순간 전까지는 자유롭다. 넓은 바다에서 작은 몸을 맘껏 움직이며, 포식자를 피해 어떻게 오늘을 살아나갈까라는 걱정을 조금은 해야겠지만 멸치는 억지로 만들어진 또는 조장된 관념을 짊어지고 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돼지와 멸치의 사랑에 대해 말해보자. 돼지는 그다지 맛도 없을 것 같은 사료를 마구 먹어대며,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신의 살을 찌운다. 어느덧 살이 통통히 오르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며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자신의 운명을 비관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곳에서 온 몸이 난자당할 때 처절한 비명소리를 지른 후 맛 좋게 잘려진 제 고기를 누군가에게 내 놓는다. 그 고기를 먹는 누군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잘근잘근 씹어 넘긴 후 자신의 살을 찌우는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을 할 것이다. 이 모습은 마치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과 같은 어딘가 모르는 폭력적인 사랑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멸치는 어떠한가? 한가롭지야 않겠지만 제 맘대로 바다를 헤엄치던 멸치는 뭍으로 나와 그들의 사랑을 실현한다. 멸치국물을 우려내는 과정을 보면 멸치의 사랑이 얼마나 헌신적인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끓는 물 속에 통째로 몸을 내던져 그 안에서 이리저리 춤을 추고 키스를 하며, -이 모양새는 제의적이기까지 하다.- 자신들이 가진 마지막 양분까지 아낌없이 내어준다. 모든 것을 다 소진한 뒤에 남는 것은 누렇고 진한 육수이다. 이 육수를 먹으며 속까지 다 시원하다는 감탄사를 내뱉는 사람을 보며 멸치는 흐뭇해 할 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눈물나는 아가페(agap)다. 이 두 가지 존재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은 급격한 속도로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인다. 소실점에서 상반된 사랑의 결합으로 탄생한 것이 정체모를 핑크색 합성동물이다.
입맛을 돋궈주는 핑크색으로 억지로 칠해진 머리 없는 동물들은 너무나 슬프다. 머리도 잘리고 얼떨결에 핑크색까지 뒤집어쓰고 게다가 몸은 벽에 딱 붙어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는데다 중력을 이겨내느라 허리까지 아프다. 타인의 비뚤어진 애정으로 -아니면 자신의 비뚤어진 사랑일지도…- 잔뜩 상처받은 채 머리도 없이 헤매는 불쌍한 동물들에게 애정어린 목소리로 골수까지 다 빼준 멸치가 말을 건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도 네 머리가 되어줄게’ 라고. 정말 위로가 될까? 위로를 해준다고는 하지만 그 모습은 너무나 기형적이다. 어쨌든 이들은 멸치 대가리를 떡하니 달고서 말없이 벽에 붙어있다.
어떤 식으로든 아름답게만 포장되는 사랑,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는 사랑의 경험. 전혀 일반화할 수 없는 수많은 개별적인 사랑의 방식들은 그 대상을 어떤 모습으로 변형시킬지 전혀 알 수가 없고, 자신 또한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어떤 관계 속에서 결국 남아버리는 사랑 아니면 억지로 만들어낸 찌꺼기처럼 남은 사랑이 과연 아름다음으로만 비춰지는 걸까?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상황이 어쩌면 색을 억지로 강요하고 모습마저 기형적으로 변형시킬지도 모르고 그것이 놓여야하는 공간마저 왜곡시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기형적으로 바뀐 멸치핑크합성동물을 보고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4월 15일(금) ~ 4월 27일(수)
- Open - pm: 5:00

김지숙개인전 -M is B-

아이가 울고 있어요: 김지숙의

덩치가 산만한 남자 아이가 울고 있어요. 그것도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혼자서 외롭게 울고 있어요. 그런데 왜 울고 있을까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았기 때문일까요. 혹시 모르죠, 버려졌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울고 있는 모습만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요. 간혹 가다 자기조차 왜 우는지 모를 때도 있는데, 어느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요. 행여, 눈을 댕그랗게 뜬 곰돌이가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개를 다리에 묻어버린 아이를 나 몰라라 하는 듯,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두 팔을 치켜 올린 것이, 옛기 이놈, 아이를 야단이라도 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네요. 참말로, 보기 딱할 정도에요.
그런데 이상도 하지요. 옷을 벌거벗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은 다 커 보이는 어른이잖아요. 모름지기 어른이라고 하면, 길을 잃었으면 길을 찾아내고, 문제가 생겼으면 해답을 궁리하는 등등, 사리분별하야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가름해보고, 이런 저런 방도를 마련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렇게 하려면, 몸을 곧추 세우고, 가슴을 활짝 열고, 두 눈을 두루두루 살펴봐도 모자랄 판인데, 어찌된 일인지 고개를 가슴에 박고서 옴짝달싹 않고 있네요. 처음부터 그랬을 리는 만무할 테고, 가슴 속 깊이 응어리가 제법 단단히 박힌 게 틀림없어요. 물론,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게 마련이지만, 저렇게 대놓고 고민한다고 티를 팍팍 내니, 궁금하지 않아도 물어봐야 예의 아니겠어요. 너무 야박해 보인다구요? 할 수 없잖아요, 아무리 나눠 갖는다고 해도, 나의 것은 나의 것, 남의 것은 남의 것, 성숙한 어른이 된 이상, 혼자서 책임을 끙끙 져야할 밖에요. 게다가, 뻔히 보이는 것도 나눠 갖기 힘든 현실인데,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눠 갖기란 얼마나 힘들겠어요. 행복을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공익광고는 살랑대지만, 곧이곧대로 믿다간 어디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겠냐구요. 물론, 노력은 해야겠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럴수럴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사실, 앞서 말은 안했지만, 벌거벗은 것도 혀를 차게 만들어요. 요즘 누드가 유행이라서 벗은 것 같지도 않고, 두 눈을 쏙 빼놓을 만한 몸매는 아니잖아요. 물론, 농담이에요. 하지만 농담밖에 할 게 없는 것을 어떻게 해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벌거벗고서 쪼그려 있는 모습이란 게, 어려운 말로 퇴행이다 기원 찾기다 기타 뭐다 하는데, 딱 잘라서 투정이기 밖에 더 하겠어요. 날 좀 바죠, 안 보면 울어 버릴 거야, 결국 이 말이라고요. 이런 것 받아주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요. 버릇만 나빠지거든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좋아요. 요즘 투정을 받아주지 않아서 울고불고 법석대는 못난이들이 좀 많아요. 자기 말 안 들어 주니까, 되지도 않는 떼를 쓰면서 헛소리를 질러대고, 엉망진창 좌충우돌 막무가내 종합선물세트가 따로 없지요. 북슬북슬한 오리는 깃털 하나만 뽑아도 동네방네 떠나가라 운다잖아요. 딱 그 짝이에요.
이런 이런, 그래도 조심한다고 했는데, 야박한 정도를 넘어서, 구박 떼기 취급이네요. 바른 말도 고운 말도 많은데, 나무라는 말 뿐이니, 복 받기는 애시당초 그른 것 같아요. 게다가 물어본다고 해놓고서, 깜빡 잊어버리기까지! 토라져도 할 말이 없네요. 하지만 말 한 마디 붙여보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에요. 왜냐구요? 자기 세계에 꼭 갇힌 채, 인형처럼 꼼짝도 안 하는 것을 보면, 말을 해도 과연 들을 수나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내 잘못인지 그 잘못인지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요.
옛날에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하면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 때로는 여우가 등장해 사람을 골탕 먹이고, 가끔은 원혼이 출현해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등등, 온갖 괴이한 세계가 펼쳐진다. 일찍이 우의・우화allegory라고 불렸던 형식이다. 등장인물이 선과 악과 같은 ‘이념’을 재현하는 까닭에, 당연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른 후, 이념 대신 ‘살아 있는 인간’이 들어서고, 그것도 모자라 열심히 인간을 살해하고 있는 오늘날 보자면, 낡디 낡은 형식과 내용인 것이다. 하지만 낡았다고 해서, 쓸모없는 것은 아닌 법, 새 시대에도 흥미로운 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니, 그게 바로 ‘일부러 떼어놓기’ 효과다. 옛날에 옛날에 하면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갈라놓고, 두 세계는 믿거나 말거나 아무 관계없다고 시침 뚝 떼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방식을 달리해, 영상에도 존재한다. 내용적으로 우의적 형상(상투적 기호)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 형식적으로 장치를 동원할 수도 있다(물론 대부분의 경우 여러 수준에서 둘을 결합하곤 한다). 전자가 비교적 과거에 많이 활용되던 방식이라면, 후자는 최근에 많이 응용되는 방식이다. 김지숙의 는 바로 후자에 속하며, ‘무대화’를 형식적 장치로 사용한 사례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현실과 호흡하는 대신, 텍스트 내부에 무대를 꾸며, 일찌감치 마음 놓고, 멀찌감치 거리 두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치 본 방송은 사실과 아무 관계없으니 운운하는 TV 프로그램처럼, 안심하라고 속삭이는 것과 비슷해진다.
게다가, 사진이기 때문에 이 효과는 더욱 강화된다. 왜냐하면, 사진이라는 매체의 성격상 끌어당기는 힘이, 회화만 못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끌어당기기는커녕, 밀어낸다고 해야 정확하겠다(이 부분에서 사진과 회화의 장단점 운운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리라). 왜냐하면, 한편으로 사진이 어떤 예술형식보다 현실을 정확히 일순간 고정시킨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표면은 마치 거울처럼 바로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리까지 씌워놓으면, 반사효과는 배가되어, 가장 현실적이라는 믿음을 비웃듯, 시선을 교란시킨다(포토리얼리즘은 이 점에 천착한 양식이리라).
이제, 이렇게 설정된 거리가 에서 과연 조직적으로 활용되고 있는지 물을 차례다. 우선 무대에서 사용된 소품을 나열해 보면, 야구방망이, 풍선, 리본, 군용모자, 세발자전거, 곰돌이인형 등등이다. 대체로 소품에 알맞게 몸짓들이 ‘우의적으로’ 연출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상투적 형상이 고의적으로 반복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곰돌이를 등에 업은 형상을 생각해 보자. 어깨를 움츠리고, 가슴을 파묻고, 쪼그려 앉은 모습은, 정확히 남성의 퇴행과 하강의 징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왜 그렇게 무너져 내렸을까. 우의에서 그런 질문을 한다면, 우문이리라.

- 전시기간 : 3월 30일(수)~ 4월 12일(화)
- Open : pm 6:00

2006 상상력발전소 작가, 기획자 공모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烋휴는 독창적인 상상력과 작업역량을 지닌 작가와 기획전을 아래와 같이 공모합니다.

- 대상 : 시각이미지를 생산하는 개인전 3회 이내의 신진작가와 기획자

- 개요 : 3개 분야의 공모를 통해 작가와 기획전을 선정하여 전시를 지원합니다.

- 분야 : 1) 개인공모A : 개인(평면, 오브제)
           2) 개인공모B : 개인(영상설치 및 매체예술) 
           3) 기획공모A : 신진 기획자 기획공모
            
- 공모기간 : 수시접수 PM13:00~PM18:00(매주 월요일 휴무)

- 전시기간 : 2006년도

- 제출자료
  작업계획서(개인공모A,B에 한함) - 새로운 작업의 개념 및 계획, 디스플레이 계획
  전시기획서(기획공모A,B에 한함) - 위와 동일
  포트폴리오 - 작업개념, 이미지, 작업노트 포함(전시참가 팜플렛 및 기타 서류첨부)
               작품슬라이드(35mm) 각 5매 와 사진이미지(8×10) 각 5매
               같은 내용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담은 CD 제출
               (포트폴리오는 반납하지 않습니다.)
             * 모든 제출서류는 A4 size로 제출

- 접수방법
2005년 수시로 방문접수(tel 02-333-0955) 및 우편 접수/
우편접수는 반드시 등기우편으로 오후1시부터 7시 까지 접수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334-1 성암빌딩 B1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烋휴 담당자 앞 /
우편번호 121-210 / 담당자 : 이랑

- 발표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의 홈페이지(www.artspacehue.com)및 개별 통보.

- 기타 주의사항
응모작의 부적절한 표절 및 그 밖의 결격사항이 있을 때는 취소될 수 있음
기타 문의사항은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烋휴(tel. 02-333-0955)로 문의바랍니다.

김잔디 개인전 -한남 방문기-

사라진 배우의 무덤

고대 풍요로운 도시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던 거대한 강의 색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강은 깊은 푸른색의 빛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빛이 없어지면서 서서히 검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 검은 색은 두개로 나뉘어진 도시의 어떤 사람도 건너기 힘들 정도의 두려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 기이한 일은 도시의 모든 생명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죽음은 기묘한 사라짐이었다. 모든 생명들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하나하나 사라지는 그런 죽음이었다. 시민들은 죽어가는 도시를 살리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갑자기 빛이 변해버린 강은 점점 더 검은 색으로 변해갔고, 도시의 동물과 식물들이 모두 사라지자 사람들도 증발해버리듯 하나하나 사라져버렸다. 도시의 모든 것이 사라지자 그 곳에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고, 그 곳에는 바람을 타고 전해진 검은 강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벙어리 배우가 나타난 것은 그 시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후였다. 그는 단지 배우였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등장은 무엇인가를 예감할 수 있는 묘함이 있었다. 그는 검은 강이 놓여진 옛 도시의 한 가운데 작은 무대를 만들었고, 몇 날 며칠을 그 무대에서 알 수 없는 몸짓으로 무엇인가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동안 계속 되었던 벙어리 배우의 연극은 배우의 사라짐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는 무덤 한 켠에 놓여져 있는 작은 무덤으로 들어가 스스로 자물쇠를 잠근 후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배우가 사라진 뒤, 기적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검은 강은 어느새 깊은 푸른색으로 돌아왔으며, 도시에서 사라졌던 모든 생명들이 다시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도시 가운데에 작은 무대와 무대위에 자물쇠가 걸린 무덤이 생겼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뿐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그 무대와 무덤은 곧 잊혀졌고, 도시는 일상의 반복 속에 조용히 묻혀졌다. 이따금씩 어느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을 때, 무녀(巫女)들이 그 무대 근처를 배회하곤 했다.
-사라진 배우의 무덤 中에서-

1. 2004년 봄, 국철을 타고 한강변을 지나던 그녀는 을씨년스러운 강물과 다리의 풍경에 매료되어 한남 역에 내렸다. 한남 역 용산 방향 옥외역사 끝에서 아래로 연결된 계단, 그 계단을 내려가니 단과 무대 벽까지 완벽히 갖춘 흡사 고대 희랍의 야외극장 같은 모습과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장방형의 기둥이 있었다.
그곳은 시간이 멈춰버린 비밀스런 기억을 간직한 무대였다. 시간의 마법사가 저주를 내려 망각의 늪 속에 던져놓은,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하여 잊혀지기를 강요한 장소였다.
묻혀버리고 잊혀졌던 야외극장과 자물쇠가 채워진 장방형의 기둥, 비석 뒤에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두개골, 쇠꼬챙이가 잔뜩 꽂힌 초소 그리고 ‘사라진 어떤 무언극의 배우’를 발굴해내자 한참동안 중지되었던 연극의 영상이 마법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 자물쇠로 비석을 걸어 잠그고는 다시는 나오지 않는 배우’를 만났노라는 그녀의 독백과 함께 멈춰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가 문득 도달한 한남풍경, 이 장소의 실제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한남 역 옆을 흐르는 한강은 풍요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근대화, 산업화, 정보화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서울의 변화에 있어, 그 힘의 중심에 한강이 흐르고 있다. 그 엄청난 변화를 생산해 낸 한강은 또 그만큼의 배설물-아무도 돌보지 않는 구조물들, 기억의 폐허들-을 잔뜩 쏟아내었다. 서울의 국철구간은 서울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가장 서울답지 못한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서울이 토해낸 잔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나 알 수 없는 외압에 의해 어쩐지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어 서울이 아닌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시간의 배설물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한강과 국철구간의 접합점인 한남 역의 이러한 이미지는 그녀가 매료되었던 만남이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다. 다만 그곳은 투명하게 숨겨져 있다는 것일 뿐.

2. 그렇다면 묻혀버린 한남의 유적지에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말? 그녀는 지극히 말을 아낀다.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게다가 말을 하려 했다 해도 그녀의 의도는 위에 줄줄이 써놓은 한강과 국철구간의 모습에 대한 회상과는 전혀 무관할 지도 모른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단절된 사건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개인역사를 가진 젊은 그녀에게는 이 묻혀진 공간이 가진 숨겨진 역사적 사건과 기록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그녀는 이곳의 방문을 통하여 역무원이 철로에서 열차에 치어 숨졌고 어떤 고위직의 관리가 그 부근의 강물에 뛰어 들었다는 현재의 사건과 기괴한 건물, 흩어져있던 동물의 사체(死體), 무속인(巫俗人)들을 관찰함으로써 과거의 사실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가상세계를 만들어내었다. 표면적 현상을 만들어내던 과거의 투박했던 이미지 생산시스템은 이제 어떤 비판을 가하기도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세련되게 다듬어져, 자신의 상상을 이 이미지 생산 메커니즘에 억지로 적용시켜 정해진 상상력의 생산품만을 만들어내는 요즘의 상황 속에서 그녀는 실제와 허구의 경계마저 불분명해보이는 기막힌 연극 한 편을 만들어 보였다. 이렇듯 뻔하게 흘러갈 수 있는 구도에서 그녀의 상상은 이를 슬쩍 배반한다. 오로지 방문에 의해서 경험이 유추되고 다시 이야기가 구성되어 창조된 가상의 연극 시나리오가 내러티브를 갖던 갖지 않던,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여기서 화두가 되는 것은 그냥 쉽사리 지나쳐가는 그래서 아무도 쉽게 방문하지 않던 장소를 그녀가 방문했다는 것과 그곳에서 만난 인물과 사건, 풍경을 통해 그녀만의 상상력으로 가공물을 만들어낸 것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설정을 통해 또 하나의 숨겨진 공간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설정유희(주어진 공간에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어 즐기는 놀이)를 즐겼다는 그녀는, 특히 사물의 용도에 대한 정보가 없을수록 그것에 대해 가하는 상상의 영역은 더 커졌었고, 그 상상의 공간은 그야말로 비일상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녀는 한남에서 만난 네모난 구조물을 야외무대로, 자물쇠가 달린 사각기둥을 무대 위에 있었던 배우의 무덤이라 마음대로 설정한 뒤, 그 외의 어느 것도 그 장소에 대한 명확함을 조사하지 않고 이곳의 기록자로서 방문하여 기이한 에피소드를 경험하고, 이 무대를 둘러싼 공간의 다양한 감정을 투사하고 또 느끼게 된다. 이렇게 최소화된 설정은 오히려 그곳에서 이리저리 차오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좁은 입구를 통해 서로 먼저 나오려는 듯이 상황을 더욱 극적이게 만드는 장치로서 역할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가지 수의 상상의 수형도(樹形圖)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실제와 가상을 오고가는 경험은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오백년 넘은 느티나무아래서 무속인(巫俗人)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마저 그녀의 상상력에 의해 환원된 모습인 듯싶을 정도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그녀는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나서 최면 상태의 기록자 내지는 매개자를 자처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을 계속 즐기려는 듯 보인다.

직접적인 말을 아끼고 있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이러한 전개방식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실제 작품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전시의 주를 이루는 구조물 오브제는 실제 한남 역에 있는 구조물을 미니어쳐 형식으로 제작한 것인데 이는 색을 잃어버린 듯한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누군가 일부러 지운 하얀 캔버스를 연상시킨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오브제 자체가 또 하나의 빈 공간의 역할을 하여, 최소한의 말로써 끊임없는 설정의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설정이 가져다주는 환상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사진 리터치나 드로잉, 캐스팅한 두개골 역시 실제의 색이 아닌 거의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한남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뿐만이 아닌 또 다시 덧칠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이야기의 결말을 한없이 유보시켜 구체화된 공간을 더욱 더 텅 비어버리게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3. 전설의 유적지를 발굴하여 그 곳에 묻혀있던 이야기를 재생시키는 것 같은 이러한 설정유희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 역시 우연한 장소에서 문득 고대신화의 잊혀졌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굳이 전설과 신화를 꺼내지 않더라도 잠자고 있던 개인의 기억을 꺼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전혀 새로운 공간 속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혹은 기록자가 되어 결말이 없는 시나리오 작가가 될 수도 있다.

도시의 어떤 곳에 숨겨져 잘 보이지 않는 야외무대가 있다. 그 옆에는 검은 강이 흐르고 음산한 갈대울음소리가 왕왕 들린다. 사라진 배우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 뒤에는 짐승의 두개골과 이리저리 흐트러진 쌀알, 그 무대를 감시하는 듯한 쇠꼬챙이가 달린 초소가 있다. 그곳에서 당신은 낚시꾼을 보게 되고, 절을 하고 꽹가리를 치고 쌀을 뿌리는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자, 이러한 낯선 풍경 앞에서 당신은 좀 더 이야기를 만들어야한다. 작가가 발견해낸 연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한남의 풍경에 시선을 보내는 몸짓은 당신에게 객석에 같이 앉아 결말을 알 수 없는 상상의 연극에 동참하자고 유혹하는 속삭임으로 들린다. artspace Hue -상상력 발전소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 03. 15 ~ 03. 27
- Opening. 2005. 03. 15. pm 06 : 00

‘신데렐라는 외출중’

“신데렐라는 외출 중”
최근 여성의 이미지는 기존의 이미지처럼 사회적 조건에 의해 객관적으로 재현되는 모습이 아닌 자신의 당당함을 표현하는 자신감 넘치는 여성들의 모습이다. 이렇듯 남성 중심의 여성 이미지에 대한 현상은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들어서 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여성이 더 이상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니고 강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재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어 퍼지는 ‘나쁜 여자 신드롬’과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하나의 트렌드 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착한 여자는 하늘나라로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 라는 문구처럼 여성에게 좀 더 자유롭고 당당해 질수 있는 기회가 제공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콩쥐, 백설공주, 신데렐라 같은 착한여자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여성의 이미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자 이시대의 진정한 나쁜 여자들이 착한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성을 포기 하거나 무시해 버리고 있는지. 어쩌면 또 다른 모습의 여성 신드롬과 외모지상주의가 더욱더 변모 되어 통념적이었던 착한여자의 이미지는 계속 되고 있는 현상이다. 그것은 모든 T.V.광고에서 또는 여성의 삶과 사랑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또한 보편적 현상인 것처럼 일반 사람들의 삶에 매우 깊이 관련이 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이미지가 대상화된 것을 보고 즐기는 관객이 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상화된 이미지를 동경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들은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당당하지만 사랑받기위해 아름다운 미소를 배워야 하며, 성공했지만 이상적인 미의 기준을 위해 시간을 소비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의 여성인 것이다.

착한여자여 신데렐라가 되자
여자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두 가지 여성상이 떠오른다.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전형적인 여성으로서 살다 왕자를 만나는 신데렐라와 이러한 삶이 아니라고 외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로라가 그것이다. 다소곳한 미소를 머금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희생하는 신데렐라는 현대의 나쁜 여자들에겐 너무나 무기력한 인생인 것이다. 우리 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이 인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 떠난 로라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현대 여성의 삶이 추구하는 모습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무조건 자신에게 희생을 요구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다음의 상황에 대해선 아무런 계획도 없고 보상도 요구하지 않은 체, 무조건 집을 나온 로라 역시도 답답한 착한 여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신데렐라를 생각해 보자. 동화 속 신데렐라는 착한여자의 대표주자다. 착하기 때문에 멋진 왕자를 만났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착해서 왕자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일 것이다. 신데렐라에게도 원하는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부와 명예를 가진 왕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며 신데렐라에게 있어 그 꿈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모든 꿈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묵묵히 기다리는 착한 마음을 가져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 전략이 있었다. 자신의 어렵고 힘겨운 인생을 바꾸기 위해 계모의 말에 반항하고 왕자님을 만나러 나왔고 또한 왕자의 모든 부탁을 거절하고 12시라는 통금시간을 지키며 신발하나를 남긴 체 아쉬움을 남기고 왕자 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전략적인 삶인가?
이렇듯 신데렐라는 가만히 앉아서 왕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자신이 찾아 나선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원하는 삶을 이루어낸 신데렐라야 말로 이시대의 나쁜 여성의 전형인 것이다. 착한여자들이여 솔직한 신데렐라가 되자
자신의 꿈을 위해 여성이 가진 아름다움을 솔직하게 표출할 수 있었던 신데렐라가 되자는 것이다. 그것이 여자를 옭아매는 여성성이라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아니라고 해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과 아름다워지고 싶은 소망은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지 애써 버리지 말자. ‘B사감과 레브레터’의 B사감처럼 스스로를 억압하여 정신 착란에 빠지느니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 모든 성공과 자신을 위해 진정한 나쁜 여자가 되는 길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보편적 생각이나 이미지를 바꾼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 필요하다면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쁜 여자들이여 당당한 것은 최고의 가치이다. 하지만 가끔은 여자로서의 전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쁜 여자의 당당함으로 얻어낸 사회적 성공만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자기만족의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싶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만이 타인의 기준에서 벗어난 진정한 여성이라고 할 수 없고 또한 여성에게 있어 버릴 수 없는 것 사랑받기를 원하며 이상적 미의 기준을 위해 어떠한 목적을 동반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한심한 여성상이라고 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이라고 결정지어졌다면 그것을 구하는 것이 이시대의 진정한 여성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들이 좀 더 솔직하게 전략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길 원하다. 그것이 남자를 누르고 성공을 하는 이시대의 나쁜 여자가 되었든 미소를 짓고 희생과 아름다움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착한 여자가 되었든 자신의 발견을 주저하지 말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 찾아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완성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저마다 자의적인 기준이 있다고 한다. 그 기준으로 세상을 두 편으로 나누는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들 일상의 모든 면에서 자리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둘로 나누어 바라본다고 한다.
세상을 반으로 나누어 생각의 넓이를 축소시키는 태도는 자신의 존재가 세상 안에서 날개를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편협한 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세상 안에서의 고착되어진 자신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착한 여자, 나쁜 여자라는 이분법으로는 여러 인간의 모든 속성을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해 본다.  독립 큐레이터  이수현.

- 전시기간 : 2005.03.02~ 3.12
- Openig :2005. 3. 2. pm 05:00

박나라개인전 “같고다른일상”

새로운 세상에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쳐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같고다른일상이야기
하늘에는 빛을 내며 날아다니는 사람, 땅에는 녹아 흘러내리는 사람. 왜 사람들이 반디가 되어 날아다니고, 한없이 녹아내리는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 일상인가? 이 기묘한 풍경으로 젊은작가 ‘박나라’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상반된 풍경은 우리가 어린시절 읽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케한다. 알다시피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회종시계를 꺼내보는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 겪는 신비한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한 나라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으며, 터무니없는 오해에 왜곡된 공간 등 전혀 상반되는 일들이 한없이 뒤죽박죽 얽혀있다. 이 소설처럼 상상 속에 하지만 내면에 존재하는 현실 같은 이야기를 작가는 ‘when you begin to flow’, ‘lightening people’을 통해 우리의 일상 속으로 끌어 들였다.

어두운 공간 속에 깜박이는 불빛, 마치 마지막 남은 작은 희망 같은 불빛은 중력의 방향이 불분명한 공간 속에 퍼지는 나지막한 목소리인 듯싶다. 그러나 고립되어 있지 않은 이 빛다발은 하나의 작은 불빛이 모여, 모여서 이루어진 군집이다. 이 빛들에게 조금씩 다가가게 되면 이들은 바로 작은 반디인간임을 알게 되는데, 이 반디인간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밝혀주며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다. 개인이 가지는 일상의 답답함과 지루함을 떨쳐버리고자 마냥 날아가 버린 큰 하늘, 애석하게도 자신의 엉덩이에서 빛이남으로 해서 볼 수 없었던 세계가 수많은 반디인간들이 모여 서로서로를 비춰주며 그들은 희망 속으로 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희망이나마 달고 날아다니는 반디인간 밑에는 육체가 녹아내리는 사람이 있다. 녹아내리기 시작한 사람의 표정은 어딘가 초점을 잃은 듯 흐릿하고, 이미 그 형상마저 알 수 없을 정도로 흘러버린 사람은 만화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혹 어떠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변형되어가는 몸에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표정은 보는 사람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제 막 흐를 때 지극히 표정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에 비해 이미 없어져버린 육체 속에 빠져버린 이는 마냥 좋다는 표정이다. 이 모습은 반디인간들과 묘한 대조를 이루어, 지독한 현실 속으로 젖어 버리는듯하기도 하고, 일상의 경계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 하기도하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소멸의 느낌마저도 작가는 일상의 틈새에서 찾아낸 또 다른 모습인것이다. 그렇다면 유체화 되버린 사람은 이미 일상 어디 한켠에서 꿈을 꾸고 있나보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태어난 이 풍경은 동화속의 삽화처럼 흐뭇하기도 하지만 여기엔 이상한 슬픔이 남아있다. 빛을 내며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모습과 다 녹아내린 육체 속에서 웃고 있는 표정에 비해, 실제 우리의 모습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인물은 한 귀퉁이에서 서서히 녹아 없어지며 방향을 잃어버린 표정은 지금의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자신의 자화상인 듯 시선을 잡아두는게 그러한 슬픔이 아닐까? 같은 공간에 얽혀있는 여러 가지 이미지는 이 공간을 어딘가 모르게 뒤틀어버렸지만, 이렇게 틈이 벌어지고 왜곡된 일상이야말로 우리에게 일탈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 일상인가? 이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보자. 모래시계의 모래가 작은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 또 하나의 모래더미를 만들고 다시 뒤집어 또 다른 더미를 만들듯, 우리의 일상에서 현실과 상상의 모습 또한 이러한 것인 듯싶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정답을 내릴 순 없지만 같기도 하고 다른 것이 일상의 경계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 애매한 차이에 대해 작가는 인간형상을 변화시킴으로 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박나라의 ‘이상한 나라의 사람’속에서 관객들은 동화 같은 신비한 일상을 경험할 것인가, 일상의 아픔을 가져갈 것인가? 작가는 같고다른일상의 모래시계를 우리에게 던져버렸다.

- 전시 일 정 :  2005 02 15 tue _ 02 27 sun

- 전시오프닝 -:  2005 02 15 tue pm 5:00

조영아개인전 DoGmatism01 / Collection - 01. Bones

원형적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영상보고서

1. 이 여인은 누구인가? 아니 여성이기나 한 것일까? 마치 남성과 여성이 나눠지기 이전의 존재처럼 연출되는 이 정체는 무엇인가? 여신과 같은 성스런 존재인가?

조영아의 영상은 저예산 B급 영화이미지로 다가온다. 그의 영상은 자칫 조악해질 수 있는 신화적 키취 혹은 패러디를 대단히 진지한 영상과 사운드로 보여주는데, 원형적인 제의적 분위기는 너무나 진지하여 비극적이기까지 한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세상의 종말의 징후를 알아챈 종교적 직관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는. 여하튼 조영아의 영상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이 여인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영상의 도입부는 몇 겹의 뼈 무더기를 지나쳐 여러 차원의 혹은 여러 겹의 경계를 거쳐 들어간 후, 한 여인이 마치 물에 둥둥 떠있듯이 줄에 매달려 있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일 줄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물에 떠있는 것이라면 이 장소는 황금가지의 디아나의 호수이거나 혹은 화서씨華胥氏가 복희伏羲를 잉태하게 되는 뇌신雷神의 호수일지도 모른다. 또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면 이 줄은 이 여성의 존재를 지탱해주고 가능하게 실현시킨 존재의 밧줄일 것이다. 물론 이 밧줄은 탯줄과 오버랩 된다. 조영아의 영상은 거의 제의적 과잉 또는 주술적 이미지의 과잉으로 가득하다.

이 여신으로 보이는(대지의 여신 혹은, 가이아?) 존재를 둘러싸고 수많은 손들이 그녀의 하복부로부터(추측컨대) 그녀를 둘러싸는 금줄(?)을 친다. 혹은 금줄로 보이기도 하고 생명을 생산하는 탯줄로 보이기도 하는 줄을 사방으로 걸쳐놓는다. 일종의 금줄이 신성한 영역과 세속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라면 이는 성역과 세속의 나눔이자 동시에 상호 개방이 되는 것이다. 혹은 이 여신을 사방으로 갈기갈기 성 聖과 속俗으로 찢어놓는 것처럼 볼 수도 있다. 또는 존재의 나눠가짐(일종의 분유)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원형적 거인신의 몸이 찢어지며 그 살덩어리에서 인간들이 생겨난다는 잘 알려진 신화를 떠올린다. 여기서 금줄은 새로운 의식 혹은 새로운 공간의 열림을 나타낸다. 동시에 이 열림은 자연의 한 사물로서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순간을 각성시킨다. 자연과 문화의 분리를 상징하는 듯 하다.

조영아의 영상은 깊은 존재의 심연에서나 가능한 침묵의 소리가 웅웅 이명처럼 울리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신이 등장하여, 세상의 창조와 인간의 탄생을 기억하는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인간종족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이 여신은 무수한 갈래의 생명의 동아줄 또는 존재의 탯줄을 사방으로 뻗어내며 생명의 활력이 사라져버린 뼈무더기 가운데에서 새로운 존재하기를 보여준다. 여신에게 나타나는 존재의 동아줄, 줄기, 생명의 끈은 인간 탄생이전의 신과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불분명한 시기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여기서 이 여인의 정체는 일단 원형적 어머니 신(大地母神)으로 여겨진다. 이는 조영아의 영상이 대지모신의 기억을 재현한 메타포로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신은 남자 신이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이끌기 이전의 시조모始祖母로서 성녀이자 동시에 마녀의 기운을 모두 지닌 존재로 보여진다. 이 신성한 존재의 뿌리는 수많은 죽음의 흔적들 사이에서 되살아난다. 한편 생의 잉태와 불모의 죽음이 상호 몸을 맞대고 등장한다. 이는 신화에 흔히 나타나는 이원성의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캘트 신화에 나오는 다누(아누)라는 지모신 혹은 겨울의 여신은 자신의 딸인 봄의 여신 브리이트(대장간의 여신이자 불을 관장하는 여신)와 대조적 관계를 갖는다. 모녀라는 혈연관계이자 혹은 존재론적 위상이 갖은 그러나 그 본질이나 성향이 정반대인 이 이상한 관계. 아마도 이러한 비극적 혹은 부정의 관계성이 신화의 중요한 특질을 이룬다. 이러한 이원성의 동거관계가 신화의 드라마적 형식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2. 온갖 형태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뼈무더기들은(뼈무더기는 일반적으로 금기 혹은 타부로 작용하는데, 흔히 죽음은 인간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자 무엇으로서 작용하는데, 그것은 원형적 두려움일 것이다.) 여러 층으로 여신을 덮고 있다. 죽음은 시간의 규율을 운영하는데, 시간이 예정한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조율한다.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 속에 자연의 모든 사물과 인간은 한갓 거품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러한 영원한 운동 중심에 이 여인이 있다. 죽음은 현대나 원시 혹은 고대의 야만적 폭력과 공포를 기록한 죽음이며 이는 인간 존재의 깊은 무의식으로 자리한다. 최초의 존재의 운동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상기시키는 이러한 뼈들의 무덤은 인간 삶의 근원적 운동 혹은 질서의 냉엄함을 또한 재현하는 기묘한 그로테스크의 텍스트로 작용한다. 과도한 뼈무더기의 해학적 요소와 묘한 대조효과를 일으키는데, B급 장르영화 이블데드 씨리즈의 우수꽝스런 뼈무더기들과 또 이와는 대조적인 2001스페이스오디세이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대단히 우아한 왈츠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동물의 뼈를 연상시킨다. 또한 무수한 손들이 사방에서 등장하여 여신을 에워싸고 줄을 엮어나가는 모습은 아주 느린 영상과 심미적 사운드의 효과와 함께 조영아의 영상이 연상시키는 앞서의 B급 장르영화들의 아이러니한 이미지 효과를 반전시킨다. 이러한 연출효과가 조영아의 기묘한 패러디의 영상을 매우 독특한 위상을 지니게 된다. 20세기 초의 표현주의의 심미성과 부조리한 존재와 시간의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표현을 다시금 패러디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버전의 신화라는 거대담론의 패러디일 것이다.

신화의 세계는 아주 선명한 묵시론적 세계이자 비유의 세계이다. 조영아의 영상작업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하는 시간의 두터운 마술적 효과와 신화적 모티브가 잘 연출된 한편의 영상으로 제시하는 신화의 보고서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미세한 시간의 차이에 의해 벌어지는 마법적 메타포의 징후가 흔히 잘 연출된 영상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굳이 편집이나 몽따쥬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폴 리꾀르는 일반적으로 신화가 이야기 형식이나 드라마 형식을 취하는 것을 매우 본질적인 이유에 의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데, 신화에 나타나는 시간과 사건들은 처음부터 원형적 드라마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조영아의 영상 또한 대단한 보편적인 신화의 드라마로 연출되어 짧은 영상 안에 세계의 시작과 끝을 함께 보여주는 원형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는 조영아의 영상에는 조영아의 개체성은 애초에 조금도 등장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신화담론의 드라마가 꽉 들어찬 영상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영아 개인이 사라진 텅빈 보편적 이야기는 개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현대예술의 방향과 역행하는 듯하다.

여하튼 조영아의 작업에서 우리는 신화는 신화일 뿐이고, 대지모신의 이야기는 다만 한 신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공허한 반복형을 본다. 한 개체가 사라져버린 텅 빈 그러나 과잉된 신화 담론의 영상을 보면서 오히려 현대예술과 이미지 문화에 깊이 각인되어 여전히 살아 작동하는 신화의 권능을 생각하게 된다. 조영아의 영상에서 우리는 이미 인류가 문명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끝장나버린 모계사회의 기묘한 노스텔지어가 투사되는데, 너무도 유연하고 부드러운 연출로 포장된 21세기 버전의 카니발적 그로테스크영상이자 영상으로 담은 제의적 제스처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 서문에 관한 작가와 서문필자의 이견 *

작가 : 조영아
서문필자 :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조영아(이하 조) : 경험적인 것을 중시하는 저에게 있어서 ㅡㅡ;;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

전체적으로 작업을 너무 노말하게 읽으신 것 같은데요…
전체적으로 망각과의 연결이 없습니다.
요는 상실, 망각된 것이거든요…
그것은 곧 저, 개인의 경험과 맞닿아있고 그것을 압축시켜 표현한 것이지요.
시처럼…

김노암(이하 김) : 노말하게 읽은 것이 맞습니다.
영상시임에 틀림없습니다. 상실과 망각에 대해서는 사실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하고 물론 작가 자신이거나 관객일 수 있겠지요. 저는 상실과 망각의 문제는 굳이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요? 이미 신화적 모티브나 이야기들이 현대에서는 의식적 차원보다는 망각의 영역인 무의식적 차원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신화적 논의에는 항상 망각의 역사 혹은 망각의 현대인이 설정된다고 봅니다.

조 : 문제는 너무 광범위하게 혹은 익히 알려진 것들에서 범위를 잡은 것, 작업의 의도가 전혀 다르게 해석된 것이 우려돼서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삭제된 상태에서의 서문은 아무래도 다른 의미의 이해의 폭을(또 다른 삼자) 주입 또는 제한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작업할 때 관객을 별로 중요 대상으로 삼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고에 있어, 약간이나마 제가 깔아놓은 메타포를 저의 설명 없이 캐취하는 관자가 몇이나 될까요… 물론 저는 설명적인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딱히 가이드적인 텍스트는 서문일 테니까요…

조 : 내용을 신화적인 요소로 너무 강하게 끌고 가신 거 같습니다.
사람들이 읽을 때 소스가 신화에 있을 거라고 단정 짓기 쉽죠…
저는 절대, 신화를 패러디한게 아니거든요…
실제로, 거대담론에서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미시담론에 가깝죠…
개인의 이야기를 이러한 장치를 통해 표현 한 것인데…
분위기를 그렇게 읽으시는 것은 상관없지만 마치 신화에서 모티브를 딴 것처럼 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의 관심은 언제나 경험적인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죠.
신화라고 한다면 개인적 신화라고 할 수 있고… 그게 머 외부와도 이어지는 것일 테니까…

실제가 드러나지 않게…하는 작업으로서 이해해주시면 될 듯…

김 :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은 실상은 대우주와 소우주의 관계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대서사의 논의 선상에서도 미시적 관점이 노출되지요. 그것을 확연히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모티브를 딴것은 작가가 아니라 글쓴이 혹은 한 관자觀者가 영상을 보면서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감상, 해석하거나(혹은 오독) 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모티브를 신화에서 따왔을 거라는 관자의 한 가설 위에 글이 진행된다고 보시면 맞을 거 같습니다.

개인의 경험이 개인적 표상으로 그리고 그것이 모여 집단적 표상화 된 것이 신화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서문은 작가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삼자의 외부의 관점에서 접근한다고 보시면 될거 같은데요. 또 신화적 담론이 개인의 경험적 면을 거세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조 : 물론 그 말은 지당한 말씀이지만,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는 작업의 시작점이라는 거죠… 모티브의 이야기는 위에 쓰신 이런 해석 없이는 판독이 불가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글의 전체적인 포커스가 일정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변형되기까지 하니까요…
가설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 즉 어떠한 제시 등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하는 바램입니다.

조 : 제 작업은 무지 솔직하고 직관에 의존하는 작업인데…
01. 저의 작업은 사실은 아주 개인적인 사고와 trauma를 표현한 것임(알려지지 않은)
소스를 부러 구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작업을 함에 있어 살아가면서 직접 체험하고, 느끼는 것을 가장 중요시함)
‘상실, 망각된 것과 만나다’라는 텍스트는 현재 저의 상태와 맞닿아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저의 존재, 상황이 일부러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고요.
(영상에서 나오는 그 줄들은 ‘상실, 망각된 것들’과 조우하는 역할로서의 끈입니다.)

김 : 작가의 작업과 영상에 투사된 개인적 체험(심리적 내상과 같은)과 직관적 면을 서문에 다루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개인사가 물론 작품에 절대적 영향을 주리라는 것은 명확하지만, 제 3자로서 필자가 그러한 측면을 배재한 채 작업을 살펴보고 이해하고자 한 것은 메타비평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관점과 비평의 방법론의 취행 혹은 선태군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가와 작품을 어느 정도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형식주의적 비평의 입자은 아니지만.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품이 단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의 기록으로 한정한다면, 사실 다양한 생산적 혹은 창의적 오독誤讀이나 감상이 원천 봉쇄되겠죠.

조 : 쓰신 서문에서는 작가의 분리는 완전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거의 제 상태가 작업에 녹아 있다고 보시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상당히 주관적이며 개인적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서문을 쓰시는 필자의 어떠한 전제를 내세우는 작업은 제 작업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오해의 소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오독의 범위를 어느 정도 합의 하에 약간이나마 줄일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 때문에 그 전에 약간의 텍스트들을 드린 거구요… 글을 잘 못 쓰는 저로서는 그 작업도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거든요…

조 : 02. 신화에 포커스를 너무 맞추신 게 아닌가요?
작업의 모든 소스를 신화에서 건져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작업에 있어서 그것은 표현하는데 있어 형태적인 것일 뿐… 중요한 것은 그 안의 내용 인데요.
시리즈(?)인 DoGmatism에 관한 텍스트를 주목해 주세요…
DoGmatism이란 단어를 굳이 선택한 것을 비추어 본다면, doctrine의 패러독스라는 게 더 맞지 않을까요.
형태적인 느낌 때문에 패러디라는 단어를 자주 쓰신 것 같은데, 단순히 형태적인 느낌에 따르기에는… ㅡㅡ;; 글쎄요…
음…어떠한 신화에 관한 패러독스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싶습니다.
물론 공허하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지요…
패러디라는 단어는 “20세기 초의 표현주의의 심미성과 부조리한 존재와 시간의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표현을 다시금 패러디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버전의 신화라는 거대 담론의 패러디일 것이다.” 이 문구에만 들어가면 될 거 같은데요…

김 : 신화에 포커스를 맞추어 쓴 것은 맞고 그 것은 감상자(서문을 쓴)의 상상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화적 담론 혹은 비평적 맥락에서 일관된 개념과 용어를 가져온 것입니다. 또한 도그마티즘 씨리즈의 연장선에서 서문을 기획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작가의 이번 영상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기 완결적인 형식을 지닌 작품이라 판단됩니다. 그래서 영상을 둘러싼 여러 설명들과 텍스트를 배제한 상태에서 서문을 썼습니다.

패러디 용어를 자주 쓰는 것은 제가 현대미술 작품들을 볼 때 주요하게 적용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구체적 상황을 설명하는 형용사는 아니고, 문화적 맥락에서 상호참조가 하나의 자연 상태가 된 현대문화의 측면을 염두한 용어입니다. 패러디(모방 혹은 창조적 인용)를 빼면 실상 현대 미술가들이 창작 상에 사용할 마땅한 것(유용한 것)들이 별로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 : 자기 완결적인 형식을 지녔다는 문구는 상당한 과찬이십니다. 불완전한 작업을 좋게 봐주셨다는 점에서 우선 감사를 드리지요. 하지만 제 작업 또는 작업과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이 두렵군요…(반응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ㅡㅡ;;) 때문에 우려되는 바, 약간의 언급(친절?설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는 작업을 할 때 현대미술의 잣대를 재고 작업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시공간에서 제가 작업하고 있는 위치를 따져서 현대미술의 기준에 들어간다고 하면 벗어날 수는 없겠지요.
(어떻게 보면 제 작업은 모던한 면이 넘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문을 보면 모던한 요소를 현대미술에서 쓰이는 용어로 풀이하시고자 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이 시점 즈음에 저의 영상작업을 해석하시는 데에 있어 오류가 발생하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의 결론이 다른 형식의 해석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정확하게는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뿐인,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개인적인 사고의 작업입니다. 다만 개체성을 굳이 드러내놓고 강조하지 않은 것뿐이지요.

조 : 03. 뼈를 모아온 과정도 중요한데, 그것들을 찾아다니고 씻고 말리는 과정…
지금껏 모아온 뼈의(분류된 뼈들) 집단들일 이번 설치물에 있어서 뼈무더기의 해학적요소 란 부분은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키취라는 단어대신… 컬트가… ㅡㅡ;;

김 : 해학적이라기보다는 정확하게는 블랙유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B급 영화들이 붉은 피와 하얀 뼈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아주 흔한 경우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염두한 느낌을 적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컬트 또한 오늘날 대단히 상투적인 미적 취향 혹은 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컬트 보다는 키치가 보다 현대의 일상적 경험과 세계에 더 폭넓게 적용 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 어감의 차이가 확연하니 블랙유머라는 단어로 바꾸신다면 그것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 작업의 폭이 그렇게 넓게 퍼져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틀을 만들어서 작업을 하고 있는 편이지요…
컬트라는 의미는 좀 더 국한된(키취보다는?) 범주의 단어로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나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려운 단어라 생각됩니다. 머리보다 가슴, 즉 숨겨진 심부에 다가간다는 점 등에서 컬트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특히나 개인적인 작업임을 강조하는 저로서는 컬트가 더 합당한 말일 것입니다.
비교적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선택한 오브제 때문에 B급 영화처럼 보이는 요소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B급영화처럼 굳이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지요..(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만일 그런 의도였다면 좀 더 오버해서 연출했을 것인데, 제 작업은 자제가 많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작업을 하는 데에는 약간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음.. 밝히지 않아도 될 듯하군요.

조 : 04. 이번 작업은 딱 두 컷으로 이루어진 영상입니다.
다른 작업과는 달리 편집에 있어서 몽타쥬를 거의 하지 않은 작업…
시간의 조작은 약간 있지요… (좀 더 느리게)

김 : 작품이 몽따쥬기법을 썼다는 것을 말하려고 쓴 것은 아닙니다. 수사적 효과를 위한 비유라고 보시면 되겠는데요.

조 : 그렇게는 생각했었습니다. 단지 이번 영상의 제작과정을 설명하는 입장에서 사족을 썼을 뿐입니다. ^^

조 : 05. 여성성 또는 모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사실, 나뉘는 성(생물학적)의 정체성에는 그다지 관련이 없지요.
단지 어떠한 하나의 존재로서 영상에 등장하는 퍼포머를 인식해주셨으면 하는 바램.
금줄 또는 탯줄이라는 이미지 같은 확실하고 단정적인 해석보다는 연결하는 선, 조우하는 줄 정도가…
primitive한 내용이 너무 강조되었습니다.
물론 주술적이고 묵시적이며, 제의적인 요소는 제 작업의 곳곳에서 느낄 수는 있는 거겠죠.

김 : 이 부분은 전적으로 신화적 맥락에서 필자가 끌어온 부분입니다. 작가의 영상의 내용이나 창작과 무관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금줄 혹은 탯줄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줄 혹은 선은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 것에 어떤 경험적 내용을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의 세계관 혹은 인생관과 관련된다고 봅니다.

조 : 음… 중복적인 내용이 될 거 같아서 생략…합니다.
그 단어들을 보고 최근 득녀하신 상황과 연관을 짓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요…

조 : 거대담론에서 시작하는 듯이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에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삭막한 개인적 기억과 감정, 느낌 그리고 숨겨진 메타포…
단지 어떠한 기억, 사건에 관한 현 상태의 보고서정도…

모호한 상태…

김 : 제가 쓴 서문은 전적으로 작가의 이번 영상 작업에만 국한하여 직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글입니다.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느낌 혹은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 혹은 투사 문제는 이번 서문에서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작가가 생각하는 서문과 작업의 관계와 제가 생각하는 관계성이 다르다고 봅니다. 그것은 상호 참조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이번 서문을 둘러싼 작가와 필자의 관점의 비교는 매우 생산적인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서문의 내용에 따른 작가의 반론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
(서문을 받은 2005년 1월1일 새벽에 이메일로 주고받은 내용이며, 수정한 부분은 없다.)